고등학생을 위한 즐거운 문예 감상과 비평
목적[편집]
《문예 감상과 비평》의 목적은 다름 아니라, 읽은 '척'을 제대로 하기 위함이다. 예컨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는 너무나도 유명한 나머지 모두가 다 읽은 척을 해서 도리어 책이 안 팔린다고 한다. 필자는 《1984》를 읽었다고 하는 사람들마다 공산주의가 어떻고 666이 어떻고 베리칩과 CCTV가 어떻고 하는 것에 심히 안타까워 했다. 조지 오웰은 골수 공산주의자란 말이다! 단지 반스탈린주의자였을 뿐이다. 그럴 때면, 나는 그런 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그것보다 윈스턴이랑 줄리아의 섹스 스토리?(2장에서 윈스턴은 일기장을 샀던 프롤 구역 고물상의 2층을 빌려서 줄리아랑 대담한 애정 행각을 벌인다.)가 더 재밌던데?"
감상과 비평[편집]
문예 감상과 비평은 작가의 관점에서, 시대적 배경에 기댄 관점에서,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주로 하는 관점 등에 따라 다양한 감상과 비평이 가능하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수능 문제로 '문학'이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학생과 교사들에게 천편일률적인 관점을 암묵적으로 강요하기 때문이다. '목적'에서 말한, 《1984》 가지고 공산주의 까기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문예는 '말이나 글로 하는 예술'이다. 따라서 문예 감상과 비평의 중점은 각 단어가 적재적소에 썼는가? 이 단어들은 어떠한 이미지를 구성하고 서로 대립되는가? 이야기 속의 '나'를 옹호할 것인가, 지탄할 것인가? '나'의 동지와 '나'의 적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나'는 왜 이렇게 행동하고 '나'에 반대되는 이는 왜 '나'에게 반대하는가? 이러한 것에 따라 다양하게 접근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무시하고 혹여나 지엽적이게도 별거 없는 단어에 집중하다가 진짜 중요한 단어를 놓친다면 그에 따른 문맹이라는 조롱을 당할지니라!) 그리고 그 감상과 비평의 주체는 바로 너이므로, 너는 너의 사적 경험과 주관을 인용하여 소신껏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쇼킹 아시아》에 대한 평론으로 "유럽인들의 저급한 SM 플레이"라고 평한 평론가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더러 "황혼이혼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추천할 영화"라고 말한 평론가를 어느 정도 존중한다.
문예의 갈래[편집]
시[편집]
시는 보통 운율을 가지는 서정적이며 함축적인 글을 의미한다. 그러나 운율을 가지면서도 긴 것이나 행 구분이 없으면서도 서정적인 짧은 글들도 시에 포함된다. 여기서 소개할 대표작은 마쓰오 바쇼의 《오래된 연못》, 정철의 《관동별곡》, 정지용의 《백록담》이다. 《관동별곡》(선조, 임진왜란 전)은 졸라 기므로 따로 링크를 건다.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보라 소리― 마쓰오 바쇼, 《오래된 연못》, 17세기 후반
1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 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 박힌다. 바람이 차기도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진(星辰)처럼 난만(爛漫)하다. 산(山) 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암고란(巖古蘭), 환약(丸藥) 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3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가 촉루(髑髏)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흉하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산모퉁이의 휘어 둘린 곳), 도깨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어진다.
6
첫 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 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읜 송아지는 움매-움매-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여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7
풍란(風蘭)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휘파람새 휘파람 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솨- 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칡넌출?('넌출'은 길게 뻗어 나가 늘어진 식물의 줄기를 뜻한다.) 기어간 흰돌 박힌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 아롱점말?(아롱아롱한 점을 가진 말)이 피하지 않는다.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삿갓나물 대풀 석용(石茸)?(석이(石栮)의 잘못)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식물을 새기며 취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 조찰한?(깨끗한) 물을 그리어 산맥 위에서 짓는 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소나기 놋날. 노끈같이 굵은 소낙비)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이겨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좇겨 온 실구름 일말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잘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정지용, 《백록담》, (1930년대)
사실, 마쓰오 바쇼의 시는 한 줄 짜리?(일본의 전통 시 양식인 하이쿠는 원래 한 줄 짜리이지만 현대에는 5박, 7박, 5박으로 끊어 들여쓰기도 한다.)라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는 딱히 말 안 해도 될 듯하다. 그럼에도 이를 소개한 이유는 '운율을 가지는 서정적이며 함축적인 글'에 가장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문제는 《관동별곡》이다. 한국의 고등학생은 《관동별곡》과 더불어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외우며 매 줄마다 "정철 씨발놈"을 덧붙인다고 한다. 특히나 학력고사 세대부터 2000년대 초 수능 세대까지는 시험 문제로 '빈 칸에 들어갈 알맞은 시구는?'이라는 게 (내신 문제도 아니고) 실제로 있었기에 앞서 적은 "정철 씨발놈"에 몇 가지 욕을 덧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관동별곡》은 공간의 이동에 따라 창평-서울-강원도로 공간적 배경이 바뀐다. 창평은 정철이 유배되어 있던 곳으로, 정철의 말로는 "나는 자연이 너무너무 좋아서 상사병에 걸린 것 같아요~."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철의 마음을 몰라준 당시 왕, 선조는 정철을 불러다가 "너 강원도지사 해라 ㅋ" 해 버린다. 그러자 정철은 태세를 전환하여 바로 서울까지 달려가서 "임금님 사랑해요 충성충성충성 ^3^" 삼창을 하고서 양주와 여주에서 말을 좀 갈아탄 뒤, 강원도로 간다. 정철은 금강산에서 본 것을 예찬하느라 시의 거의 절반을 할애한다. 정철이 놀러간 관동팔경은 전부 바닷가인 태백산맥 동쪽에 있다. 그런데, 강원도 관찰사가 머무는 강원감찰은 태백산맥 서쪽의 원주에 있다. 즉, 이 말은... 정철은 관동팔경이 보고 싶다고 가마꾼을 부려다가 태백산맥을 여러 번 넘게 한 것이다! 다만 8경 중 일부만 둘러보고 오는데, 그 관동팔경만을 순서대로 쓰면 아래와 같다.
- 총석정 (고성)
- 삼일포 (고성)
- 경포대 (강릉)
- 죽서루 (삼척)
- 망양정 (울진)
즉, 북에서 남으로 바닷가를 따라 순서대로 유람한 것이다. 다만 실제 시에서는 계절이 지났다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이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본 것은 아니다. 또한 시의 처음, 가운데, 끝에서든 자신을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한 임금을 어떻게라도 예찬하려는 것은 잊지 않는다. 또한 정철은 술 퍼먹고 맛이나 갔는지 "나는 신선이었으며, 옥황상제 앞에서 경을 읊다가 한 글자 잘못 읽어서 적강한 것이다. 저 바다의 갈매기는 나의 벗이며 나는 동해의 물을 북두칠성으로 퍼다가 잘 익은 술처럼 마시고 싶다. 아, 근데 난 강원도지사니까 나중에 마셔야겠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맨 마지막 줄에는 3-5-4-3으로 끊어서 임금을 예찬한다.
수험생들과 달리 국문학자들이 《관동별곡》을 예찬하는 이유는 여기에 쓰인 표현 때문이다. 관동별곡에는 먼 것과 가까운 것의 대비, 직유 및 은유적 표현, 대구법, 자연물을 이용한 계절 표현, 유교 및 도교적 사상, 경치에 대한 예찬, 이미지의 활용 등 온갖 표현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음악으로 따지자면 베토벤의 《발트슈타인 소나타》나 《하머클라비어》 같은 수준이라는 것인데... 이에 대한 평가는 역시 네게 맡긴다.
네가 읽은 대로 보통은 3(4)-4-3(4)-4로 끊는 식으로 길게 길게 쓰다가 맨 마지막 줄에서 3-5(6)-4-3으로 쓰는 시를 '가사'라 한다. 이는 한국 전통 시 양식인 '시조'에서 확장된 것으로, 이를 잘 지킨 가사를 '정격 가사'라 한다.
치유한다는 기분으로 정지용의 《백록담》을 읽자. 정지용은 모더니스트로 유명하다. 특히 이미지의 적극적 활용이 탁월하다고 평가받는다. 이 《백록담》은 화자가 한라산을 올라 백록담까지 가는 여정에 따라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간단한 문장으로 담담히 서술한 시다. 이는 자신이 한라산을 오르면서 본 꽃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마소의 울음소리, 행동 등 듣고 보고 느낀 것을 담담하게 서술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정지용은 또한 반일 성향이 강했고, 해방 후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정지용의 이런 성향으로 비추어 볼 때,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라는 구절은 당시 조선의 상황을 떠올리며 탄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설[편집]
소설은 '사실이나 상상에 기대 쓴 허구의 이야기'를 뜻한다. 소설(小說)이라지마는, 박경리의 《토지》나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자체만으로도 장편에 속하지만, 미완성 유작이라서 현재까지 나온 부분은 겨우 프롤로그에 불과하다고 한다.),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처럼 책 한 권으로 감당이 안 되는 양의 이야기도 소설이라고 불린다. 또한, '동화'(童話)도 당연 소설에 속한다. 여기서 소개할 소설은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년)과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1888년),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1933년)다. 이들 모두 길이가 길어서 읽는 것은 너희가 스스로 알아서 해 보기를 바란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문열의 대표작이다. 학교 내에서 일어나는 서열 정리와 폭행과 따돌림, 꼰대들의 문제를 통해 한국 사회를 나타냈다고들 말한다. 또한, 보통 사람들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 한병태라고들 한다지만,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엄석대다. 엄석대는 반에서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제왕 그 자체로, 반 아이들에게 갖은 심부름을 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서 약주을 마시는 등의 장부다운 행동까지 보였다. 사람은 힘이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힘으로 우위를 점해서 남들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 그게 약육강식의 법칙이고, 자연의 순리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만큼 이 힘의 논리를 거역하는 것은 매우 부당한 행동이다. 한병태는 인간이 멋대로 세운 윤리와 같은 인위적인 규칙에 얽매여 살던 인물이므로 자연의 순리를 거역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엄석대와 같은 사람에게 철저히 유린되어야만 한다. 그게 올바른 논리인 힘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회에는 엄석대와 같은 사람이 기득권이 되어 무능한 하층민들을 착취해야 한다...
이상은 '아무리 그래도 이딴 식으로 독후감 쓰면 좆된다'의 예시였다. 일단 소설에는 '인물'이 등장하는 만큼, '인물', '사건', '배경'과 '상황', '정서', '태도'를 바탕으로 주요 인물의 관계도와 그 변화를 정리하는 편이 낫다.
- 한병태: 서울에서 전학 옴. 찐따. → 스톡홀름 신드롬에 빠짐. (아마도 이문열 자신?)
- 엄석대: 시골학교 일진. → 서울 출신 담탱에게 시험지 바꿔치기 한 거 걸려서 몰락.
- 꼰대 담탱: 엄석대를더러 우등생이라고 비호
- 서울 출신 담탱: 엄석대가 휘어잡은 권력을 빼앗았더니 독재함.
- 주변 초딩들: 기회주의적이고 무사안일주의적인 소시민들 (엄석대에게 사바사바 → 서울 출신 담탱에게 복종함)
즉, 여기서는 옹호하거나 그리워 하거나 동정해 줄 만한 인물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누군가가 이 소설을 가지고 "나는 한병태파요!", "나는 엄석대파요!" 하는 자들이 있다면(고린토1 1:12), 너는 "그렇다면 이문열 가랑이가 쪼개졌다는 말이냐!"(고린토1 1:13) 하고 일갈하면 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퇴폐주의, 유미주의로 유명한 극작가 겸 시인 및 소설가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유명한 《행복한 왕자》는 사실 한참 도덕적인 주인공들과 비극적인 결말과 기독교적 구원 뿐만이 아니라 어두운 사회 풍자와 동성애 암시 등이 섞인 소설이다.
- 행복한 왕자 동상: 고귀하고 고귀하시며 고귀하신 제 정치인 각하께서 서민들의 세금을 갹출해다가 광장에 세운 동상. 석가모니의 경우처럼, 궁 안에서는 궁 밖의 상황을 모르고 살다가 광장에 서고 나서야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고 제비를 통해 남몰래 도와주기로 한다. 동상이 흉해진 뒤로는 용광로로 들어갔으나 (이 와중에도 정치인들은 광장에 제 동상이 서야 한다고?(이는 오스카 와일드가 박정희나 윤석열 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며, 단지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작가의 개인적 일탈일 뿐임!) 싸웠다.) 심장은 녹지 않았고 제비와 함께 천국행.
- 제비: 이집트에서는 갈대를 사랑했다가 유럽에 와서는 왕자를 사랑한 수컷 제비. 월동 시기를 놓쳐 동사.
새로 알게 된 내용을 바탕으로 이전과 인식의 차이가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토론하도록 한다.
제임스 조이스는 현대 영어 문예의 대가로 불리는 아일랜드의 작가로, 《피네간의 경야》는 온갖 오마주와 난해한 단어 등으로 인해 '기괴한데 멋있다(?)'라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마침, 1페이지를 실을 기회가 있어, 여기에 적자면,
강은달리나니,이브와아담교회를지나,해안의변방으로부터만의굴곡까지,회환의비코환촌도곁으로하여,하우드성과주원까지우리들을되돌리도다.
사랑의재사,트리스트람경,짧은바다너머에서부터,그의자지반도고전을재휘투하기위하여소유럽의험준한수곡차안의북아모리카에서아직재착하지아니하였으니:오코네유천에의한톱장이의암전이그들항시자신들의감주수를계속Doubl린하는동안조지아주,로렌스군의능보까지자신외과적하지않았으니:뿐만아니라원화로부터혼일성이아차아차풀무하여다변강풍패트릭을토탄세례하지않았으니:또한아직도,비록녹욕이후긴하나,한양피요술사파넬이얼빠진늙은이사악을축출하지아니하였으니:아직도,비록베네사애희에서모두공평하였으나,이들쌍둥이에스터자매가이일단의나단조와함께격노정하지아니하였나니라.아버지의맥아주의한펙마저ㅈ헴또는셴으로하여금호등에의하여발효하게하지아니하였나니그리하여눈썹무지개의혈동단이수액면위에지환연히보였을지라.
추락(바바바달가락타かッみなっ롱콘βροντㅗㄴ네론투온þunntro바르하우나운스카운투후후르데넨투르눅!)
riverrun, past Eve and Adam's, from swerve of shore to bend of bay, brings us by a commodius vicus of recirculation back to Howth Castle and Environs.
Sir Tristram, violer d'amores, fr'over the short sea, had passencore rearrived from North Armorica on this side the scraggy isthmus of Europe Minor to wielderfight his penisolate war: nor had topsawyer's rocks by the stream Oconee exaggerated themselse to Laurens County's gorgios while they went doublin their mumper all the time: nor avoice from afire bellowsed mishe mishe to tauftauf thuartpeatrick: not yet, though venissoon after, had a kidscad buttended a bland old isaac: not yet, though all's fair in vanessy, were sosie sesthers wroth with twone nathandjoe. Rot a peck of pa's malt had Jhem or Shen brewed by arclight and rory end to the regginbrow was to be seen ringsome on the aquaface.
The fall (bababadalgharaghtakamminarronnkonnbronntonnerronntuonnthunntrovarrhounawnskawntoohoohoordenenthurnuk!)
― 제임스 조이스, 《피네간의 경야》
나도 뭔 소린지 이해 못 했다. 다만 '아모리카'는 armor(갑옷), America(아메리카)를 엮었고, '자지반도고전'이 penis(자지), peninsula(반도), isolate(고립시키다), war(전쟁)을 엮어서 만든 단어라는 것만 겨우 알아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 작품을 소개함으로써 보이고 싶은 것은 이걸 이해하라는 게 아니라, 이런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을 읽고 어떤 생각이 드느냐는 것을 자문해 보라는 의미다.
수필[편집]
수필은 작가의 개성이나 인간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유머, 위트, 기지가 들어 있으며, 작가 개인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적은 산문으로, 수필의 가장 큰 특징 겸 장점은 '무형식의 형식'으로 다른 문예에 비해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다. 즉, 조석의 《마음의 소리》가 만화가 아닌 그냥 글이었다면, 이론상으로는 수필로(?) 분류된다. 그런다고 수필을 일상물 웹코믹으로만 배울 수는 없지마는, 수필은 다른 문학 가운데서도 '이건 확실히 유명하다!'라고 할 만한 게 많지 않아서 소개할 작품을 고르는 데 좀 많이 고민했다. 그렇게 고른 작품이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1974년)과 바울로의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1세기), 이상의 《산촌여정》(1935년)이다.
《방망이 깎던 노인》에서 화자는 노인이 방망이를 쉬엄쉬엄 깎다가 이리저리 둘러보기를 반복하자 차 시간 늦는다고 닦달을 한다. 이때, 노인은 "생쌀을 재촉헌다구 밥이 되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디!"라고 말한다. 일반에서는 이 수필을 가져다가 장인 정신에 대한 찬미를 드러낸다고들 하지만, 이 노인의 말을 통해 "의지와 노오력이 부족하다! 노오력!"을 비판하는 데에 초점을 두지는 않는 듯하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이하 '고린토1')는 초기 기독교 신학자인 바울로가 현재 그리스의 코린토스 섬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 중 하나다. 코린토스 교회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것을 바울로가 듣고서 쓴 편지로, 초기 기독교 신학과 교리가 함축적으로 들어 있다. 그 가운데 13장은 특히 읽어볼 만하다. 13장은 바울로가 기독교의 중심적인 교리인 '사랑'에 대해 예찬하는 장이기도 하지만, 《공동번역 성서》는 한국어 번역이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므로 무종교인이나 타 종교인들도 간단히 읽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 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 고린토1 13장, 바울로 저작, 공동번역 성서 (대한성서공회 번역 저작권 소유)
개신교에서는 13장 10절에 비추어 보아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으며, 이 때문에 현재에는 은사가 내려지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지만, 개신교 외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같은 글을 가지고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며, 기독교 비주류 중에는 '신은 죽었다(!)'라고 주장하는 신학?(이를 사신신학(死神神學, Gott-ist-tot Theologie)이라고 한다.)도 있는 만큼, 혹 이를 계기로 기독교를 비평하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영지주의 같은 것도 참고해 볼 만하다.
이상의 《산촌여정》은 이상이 폐렴 때문에 서울을 떠나 평안남도 성천읍에 머물면서 느낀 바를 쓴 글이다. 도시민의 시각으로 산촌을 바라본 시각으로 작성된 글로, 자신이 보고 들은 것 또한 도시의 것에 비유하는 것과 이국적 표현, 추상적인 것의 구체화가 특징이다. 또한, 이 글에는 그 시절 상표나 회사, 일본 어휘가 자주 등장하기에 주석이 잘 달린 것으로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희곡[편집]
희곡은 다른 문예와 달리 배우의 몸을 통해 공연을 하기 위한 예술 작품이다. 희곡하면 따라오는 단어인 드라마는 고대 그리스어의 '행동'에서, 시나리오와 신은 고대 그리스어의 '무대' 또는 '배경'에서 유래되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희곡이 많아서 고르기 어려웠다. 그래서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 로렌초 다 폰테의 《돈 조반니》를 소개토록 하겠다.
오스카 와일드는 앞서 말했듯이 퇴폐주의, 유미주의 극작가다. 《살로메》는 바로 와일드의 대표작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들은 이 작품을 힐난하여 상영 금지되었으나,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와일드는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영국 극작가다.'라는 칭송을 듣기도 하였고,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이를 오페라로 만들기도 하였다.
《살로메》에서 눈여겨 볼 점은 색채 이미지의 참신한 활용과 등장인물에 따른 달('살로메'의 표상으로 여겨지는)의 인상 차이, 살로메의 치명적인 매력이다.
로렌초 다 폰테는 18세기~19세기의 이탈리아 극작가로,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코지 판 투테》로 유명하다. 이들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오페라로 만들어졌으며, 모두 모차르트의 명작으로도 손꼽힌다.
《돈 조반니》의 주인공, '돈 조반니'는 바람둥이다. 이는 '주인공은 도덕적이다.'라는 암묵적인 규칙을 깬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이러한 형식을 '피카레스크(Picaresque) 형식'이라고 한다. 돈 조반니는 이탈리아에서 640명, 독일에서 231명, 프랑스에서 100명, 튀르키예에서 91명, 스페인에서 1003명의 여자랑 사귀었다가 걷어찬 희대의 바람둥이로, 극 중에서도 두 명의 여자를 겁탈하려고 한다. 또한 극 초반에서는 살인도 저지르는데, 이 죽은 자는 공동묘지의 석상이 되어 극의 마지막에는 돈 조반니에게 회개를 재차 권한다. 그러나 돈 조반니는 회개를 거부하고 죽는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와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회개를 거부하는 돈 조반니의 모습을 극찬한 바 있으며, 특히 쇼는 자신의 대표 희곡인 《인간과 슈퍼맨》에서도 이에 대한 오마주를 등장시켰다. 이렇게 통상의 관념상으로는 '부도덕적인' 주인공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는 행동을 극찬하는 평도 있는 만큼 자신만의 '도덕철학'을 가진 자는 통념과는 다른 평을 남길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