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은 비진리다

리버티책, 모두가 만들어가는 자유로운 책

덴마크의 기독교(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인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의 저작 중 하나인 '군중은 비진리다'(The Crowd is Untruth)의 한국어 번역.

본문[편집]

친애하는 당신에게.

이 헌신을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이것은 항상 눈가리개를 한 상태로, 그러나 성실하게 전달된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 한다. 그대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알지 못 한다. 그대가 누구인지 나는 알지 못 한다. 그러나 그대는 나의 희망이자, 기쁨이며, 자부심이고, 알려지지 않은 명예다.

이제 내 노동에서 정직하게 의도한, 적절한 기회가 찾아왔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한다. 내가 쓴 글을 읽는 것이 세상의 관습이 되거나 심지어 그것을 읽은 것처럼 자신을 내세움으로써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적절한 기회가 아닐 것이다. 반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았다면 오해가 승리했을 것이고 나를 속였을 것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나에게 가능한 변화이며, 기본적으로 영혼과 마음의 분위기에서 내가 바라는 것이며, 이는 변화 너머로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부분적으로 "생명", "진리", "길"에 대한 철저하고 잘 숙고된 견해를 인정하는 것이다.

군중이 있는 곳에 진리도 있다는 인생관이 있다. 그것은 진리 자체가 필요하며 군중을 편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다른 인생관이 있다. 군중이 있는 곳에 비진리가 있기 때문에 잠시 동안 문제를 가장 멀리 결론짓기 위해 모든 개인이 은밀히 진리를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그들이 군중 속에 모이면 (그래서 '군중'이 어떤 결단, 투표, 소음, 큰 목소리에 대해 중요성을 갖는다면) 비진리는 즉시 받아들여질 것이다.

군중은 비진리다. 영원하고 경건하며 기독교적으로, 사도 바울로가 말한 것은 유효하다.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여러분도 힘껏 달려서 상을 받도록 하십시오.

― 공동번역성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9장 24절

비교 대상 때문이 아니다. 비교 대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모든 사람이 그런 상을 받는 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상은 오직 한 사람만이 받는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며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만 대화해야 한다. 상은 오직 한 사람만이 받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신성과 친족 관계에 있거나 인간이 된다는 것은 신성과 친족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세속적이고 현세적이며 바쁘고 사회친화적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만 상을 받는다니 이 얼마나 불합리한가! 여러 사람이 합하여 상을 받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그리고 우리가 많아지면 더 확실해지고 각자에게도 더 쉬워진다. 이것은 확실히 훨씬 더 가능성이 있고, 또한 모든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상과 관련하여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가 허용된다면 유일한 진리가 된다. 이 관점은 하느님과의 영원한, 신성과 인간과의 관계를 모두 폐지하기 때문이다. 이를 폐지하거나 우화로 바꾸고 그 자리에 근대를?(Modern. 키르케고르 시대의 '현대'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근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사실상, 옛 이교도를) 두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이성을 타고난 인종에 속하는 표본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종, 즉 종이 개체보다 높거나 개체가 아닌 표본만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밤하늘처럼 고요하고 일시적인 시간 너머로 높이 솟구치는 영원과 이 고귀한 지복의 상태에서 조금도 현기증이 나지 않고 이 수많은 사람들을 보살피시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시는 하늘에 계시며 위대한 심판이신,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즉, 모두가 상을 받게 될 수는 있으나 그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그러므로 군중이 있는 곳 또는 군중이 있다는 사실에 결정적인 중요성이 부여된 곳에서는 아무도 최고의 목적을 위해 일하거나 살거나 노력하지 않고, 오직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위해 노력한다. 영원하고 결정적인 것은 오직 하나가 있는 곳에서만 일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스스로 이렇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대를 도우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군중은 비진리다.

군중! 이것이냐 저것이냐, 살아 있거나 오래 전에 죽었거나, 비천하거나 고귀하거나, 부자거나 거지거나 등등에 상관없이 그 개념 자체에서, 군중은 비진리다. 군중은 한 개인을 완전히 회개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만들거나 결정의 일부로 만들어 책임을 약화시킨다. 잘 살펴보면,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에게 감히 손을 댄 병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는 진실이다. 그러나 군중이 되려는 의식이나 생각을 가진 3~4명의 여성이 주어졌을 때, 그것이 누구인지, 누가 시작했는지 확실히 말할 수 없다는 가능성에 대한 확실한 희망과 함께, 그들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손을 대려는 데에 용기를 가지게 된다. 이는 비진리다! 첫째 비진리는 군중 속의 한 개인만이 하는 일을 하거나, 군중은 각 개인이 하는 일만 한다는 것이다. 군중은 손이 없는 추상화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죽이게 된다면 그것은 어느 한 개인이 두 손을 사용해서 마리우스를 해친다는 것을 뜻하므로, 군중에 속한 다른 사람의 손이 사용된 바 없다는 식이다. 물론 군중에는 손이 없으므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다. 둘째 비진리는 군중이 용기를 가진다는 것이다. 군중이 늘 그렇듯이 모든 개인은 군중보다 비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군중 속으로 도망쳐 들어간 개인은 개인이 된다는 것에서부터 도망친 것이다. 그런 자는 자신의 비겁을 전체에게 떠넘긴다. 이 전체의 비겁이 바로 군중 그 자체다. 이제 가장 높은 것,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자. 또한, 전 인류, 그리고 앞으로도 태어났고 앞으로도 태어날 모든 인간들도 말이다. 인간이 한 개인으로서 홀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와 단 둘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상상해 보자. 한 개인으로서 그는 그에게 다가가서 그에게 침을 뱉는다. 인간은 태어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군중 속에 남아있기에 그럴 용기가 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비진리인지!

군중은 비진리다. 선동꾼보다 하나의 인간이 된다는 것을 더 경멸하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 어떤 한 사람이 선동꾼에게 접근한다고 치자. 고작 한 명이라니! 선동꾼은 거만히 그를 내쫓아 버릴 것이다. 선동꾼에겐 적어도 백 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천 명이 있다면 그 선동꾼은 군중 앞에서 넙죽 엎드려 싹싹 빌 것이다. 이는 비진리다! 이래선 안 된다. 개인이 있을 때, 인간이 됨을 존중함으로써 진리를 표현해야 한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이가 궁핍한 인간이라면 특히 그를 가장 좋은 방으로 초대해야 하고, 가장 친절하고 다정한 말로 그를 대해야 한다. 이는 진실이다. 반면에 수천 명이 넘는 군중에서 '진리'를 투표로 결정하게 되었을 때, 특히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 아버지께 악에서 구하소서.?(주기도문 중 일부)라고 마음 속으로 기도하지는 않더라도,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최후의 수단으로서 군중은 비진리이나,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영원히 사실임을 경건하게 표현한다. 이는 진실이다.

군중은 비진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말한 것처럼, 군중과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으려 했고 군중에게서 아무런 도움도 받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는 절대적으로 밀려났고, 정치단체를 만들거나 투표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 개인에 대한 자기 자신이 진실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진실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순교자다. 태중의 아이가 진실로 '진리'를 섬기겠다고 결심할 수 있다면 그 역시 순교자다. 그 순교는 태중에 있는 동안에도 일어난다. 군중을 얻는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속임수가 아니다. 약간의 재능, 어느 정도의 비진리, 인간의 열정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진리의 증인은 없다. (오호라, 모든 인간은, 나와 그대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군중을 감히 상대할 수는 없다. 자연히 정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최대한 정치인과 혼동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진리의 증인의, 경건한 일은 모든 사람을 항상 개인적으로 은밀한 골목 등에서 이야기하며 대하는 것이다. 군중을 모으지 않고 군중을 해체시켜 이들을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내 개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반면에 '군중'이 '진리'에 관한 최후의 법정으로 여겨진다면, 진리의 증인은 덕 많은 여자가 춤판을 싫어하는 것보다도 더 미움을 받게 된다. 그리고 최후의 법정으로서 '군중'을 말하는 사람들을, 진리의 증인은 비진리의 나팔수로 간주한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와 유사한 영역에서 타당성이 있는 것은 전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그것이 지적, 영적, 종교적 영역으로 옮겨갈 때 진리가 아닌 것이 된다. 그리고 이 경고과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덧붙이자면, 내가 말하는 '진리'는 '영원한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정치는 이 '영원한 진리'와는 관련이 없다. 만약 '영원한 진리'를 현실 생활에서 구현하려는 정치 활동이 있다면, 그리고 그 '영원한 진리'가 참된 것이라면, 그러한 정치 활동은 곧바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정치적인' 활동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군중은 비진리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불행을 생각할 때마다, 심지어 고대 세계의 가장 큰 불행과 비교하더라도, 일간지와 익명이 우리 시대를 더욱 미치게 만든다는 점에서 나는 울어 버릴 것만 같다. 진실로 추상적 개념에 불과한 '군중'은 자신들이 '진실'의 최후의 법정이라고 주장한다만, 이제껏 그런 군중의 집회는 열리지 않았다. 익명이 언론의 도움을 받아 하루종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지적, 윤리적, 종교적인 면에서도) 지껄일 수 있다는 것, 개인적이며 특별한 상황에서는 그것을 말할 최소한의 용기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아가리를 벌릴 때마다 ― 그것을 입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 즉시 수천의 수천 명에게 자신을 말할 수 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만 번에 만 번을 반복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도 그에 대해 대답할 필요가 없다. 고대에는 비교적 회개하지 않는 군중이 전능했다. 그런데 지금은 절대로 회개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익명이며 또한 허상이다. 저자도 익명, 군중도 익명, 가끔은 구독자도 익명. 익명!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시여, 이런 국가들은 스스로를 기독교 국가라고 부르기까지 합니다. 다시 언론의 도움으로 '진실'이 거짓와 오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 이런 말을 하는 그대여, 자문해 보라. 군중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불편한 진리와 언제나 달콤한 비진리 중 어느 것에 신속하게 다가가는가? 게다가 이것은 자신이 속았다는 인정과 결합되어야 한다! 아니면 그대는 '진실'이 사전 지식도 없이, 학교 교육도 없이, 훈련도 없이, 금욕도 없이, 자기 부정도 없이, 정직한 자기 염려도 없이, 참을성 있는 노동도 없이! 비진리만큼 신속히 이해되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하는가? 아니다. 이 비진리를 더 혐오하기를 바라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진리'는 그렇게 빨리 서두르지 않는다. 진실은 눈에 쏙 들어오는 환상적인 모습을 띄지 않는다. 거짓만이 그러한 모습을 띌 수 있는 것이다. 진실을 전하는 자는 단 한 명의 개인이며 그 소통은 개인과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삶의 관점에서는 한 개인이 바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하느님의 눈 앞에 있지 않고서야 하느님의 도움이나 하느님의 개입 없이는 주고받을 수 없다.?(소크라테스의 산파법을 이어받은 키르케고르의 간접적 의사전달에 대한 말이다.) 이는 신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개인에 의해서만 주고받을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모든 개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추상적이고, 환상적이며, 비개인적인 군중이나 대중은 매개자로서 하느님을 제외함으로써 진리에 다가설 수 없다. 개인적이며 진리인 하느님은 비개인적인 관계에서 매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개인, 무조건적으로 모든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진리이자 두려움이며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윤리-신앙적으로 볼 때, '이웃'을 '진리'에 대한 최후의 법정으로 여기는 것은 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이로써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웃'은 인간 평등에 대한 절대적으로 참된 표현이다. 모든 사람이 진실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면 온전한 인간 평등이 무조건 이루어질 것이다. 진실로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무조건적인 인간 평등을 표현한다. (나처럼 자신의 노력이 미약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임무라는 것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인간 평등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나는 성경에서 군중을 사랑하라.군중을 진리의 최후의 법정으로 여겨라. 따위의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이웃 사랑은 자기 부정이고, 군중을 사랑하거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것을 "진리"의 최후의 수단으로 삼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권력을 얻는 길이며 모든 종류의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이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비진리다. 군중이 비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의 제시되지 않는 이 견해를 인정하는 사람은 (가끔 몇몇은 군중이 거짓이라고 믿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군중이 자신의 의견을 집단적으로 수용하기만 한다면 뭐든 좋댄다.) 자신이 약하고 무력한 사람임을 스스로 인정한다. '한 개인이 권력을 가진 군중과 어떻게 맞설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서 그는 윤리-신앙적으로 군중이 진실의 최후의 법정이 아니라는 견해를 자신의 편에 서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저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처음부터 나약함과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음에 썩 내키지 않는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공정하다는 것, 단 한 사람의 그 누구의 기분도 상하게 하지 않는 것, 단 한 사람의 그 어떤 사람도 구별하지 않는 것이다. 군중은 실제로 한 개인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개인이 있는 그대로, 한 개인이 되는 것은 모든 사람의 힘 안에 있어야만 한다. 스스로가 군중이 되어 스스로를 막지 않는 한, 아무도 한 개인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군중이 되는 것, 군중을 자기 주위에 모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삶이다. 가장 선한 사람조차도 군중을 모으겠다고 말하면 한 사람을 쉽게 화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 영향력, 명성, 지배력을 가진 것은 군중이다. 그렇기에 군중이 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삶이다. 압제적으로 개인을 약하고 무력한 존재로 간과하는 것은,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으로 영원한 진리인 독신 개인을 간과하는 것과 같다.

도보시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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