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하에서 인간의 영혼

리버티책, 모두가 만들어가는 자유로운 책

사회주의가 수립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점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남을 위해 살아야 하는 추악한 필요성으로부터 사회주의가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탈출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말이다.

지금이든 예전이든, 세기와 더불어서 다윈(Darwin) 같은 훌륭한 과학자나 키츠(Keats) 같은 위대한 시인과 르낭(Renan)처럼 예리한 비판 정신, 플로베르(Flaubert) 같은 최고의 예술가는, 다른 시끄러운 주장으로부터, "벽의 은신처 아래에" 선다는 플라톤(Platon)의 말처럼, 자신을 고립시킬 수 있었고, 그래서 자기 안에 있는 완전한 것을 실천하려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이익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예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건강에 좋지 않고 과장된 이타주의로 자신의 삶을 상울 것을 강요받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독한 가난과 지독한 추레함, 지독한 굶주림에 둘러싸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강하게 동요하는 것은 이 모든 것들 때문에 불가피하다. 사람의 감정은 사람의 지성보다도 더 빠르게 움직인다. 그리고 내가 언젯적에 비평의 기능에 관한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생각에 공감하는 것보다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이에 따라, 훌륭하지만 잘못된 의도로, 사람들은 매우 진지하고도 매우 감정적으로 자신이 본 악을 처치하는 일을 벌였다. 그런데, 이들의 치료법은 질병을 치료하지 않고 단지 질병을 연장할 뿐이다. 실제로, 이들의 치료법은 질병의 일부일 뿐이다.

예컨대,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살린다거나 엄청 진보된 학교로 이들을 즐겁게 하려고 노력한다고 치자.

그러나 이는 해결책이 아니라 어려움을 악화시킬 뿐이다. 적절한 목표는 빈곤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토대 위에서 사회를 재건하거나 노력하려는 것이다. 이타적인 미덕은 정말로 이 목표의 수행을 방해해 왔다. 최악의 노예 소유주들이 노예들에게 친절히 해서 체제의 공포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나타나거나 이해되는 것을 막는 자들인 것처럼, 지금 잉글랜드의 상황에서 가장 해를 끼치는 자들은 가장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이 문제를 진정으로 연구하고 삶을 아는 자들이 ― 이스트엔드(East End)에 사는 교양인들이 ― 앞으로 걸어나와서 지역 사회에 자선이나 자비 등 이타적 충동을 억제할 것을 간청하는 광경을 보았다. 이들의 근거는, 그러한 자선은 우리를 타락시키고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이들은 완전히 옳다. 이런 자선은 너무나도 많은 죄를 만들어낸다.

사유재산 제도의 결과로 말미암아 생기는 끔찍한 악을 완화하기 위해 사유재산을 쓰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말도 있다.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불공평하기도 하다.

사회주의하에서는 이 모든 것이 물론 바뀌게 될 것이다. 악취나는 굴이나 악취나는 넝마 속에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사는 게 불가능한고 완전히 혐오스러운 환경에 처해 건강치 못하고 배를 주리는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사회의 안전은 지금처럼 날씨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서리가 내려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실직되지 않고, 역겹고 비참한 상태로 거리를 배회하거나 이웃에게 구호품을 구걸하지도, 혐오스러운 대피소 문 주위에 몰려들어 빵덩어리와 불결한 숙소를 찾지도 않을 것이다. 사회 각 구성원은 사회의 일반적인 번영과 행복을 공유할 것이며, 서리가 내렸다고 더 나빠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 그 자체는 개인주의로 나아갈 수 있기에 그만한 가치를 갖는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또는 뭐라고 부르든 간에, 사유 재산을 공유 재산으로 전환하고 경쟁을 협력으로 대체하여 사회를 완전히 건강한 유기체의 적절한 상태로 복원하고 지역 사회 각 구성원의 물질적 복지를 보장할 것이다. 이는 삶에 적절한 토대와 적절한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완전성으로 삶의 충분한 발달을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바로 개인주의다. 사회주의가 권위주의적이라면, 지금의 정치 권력처럼 경제 권력으로 무장한 정부가 있다면, 다시 말해서 만약 우리가 산업 폭정을 갖는다면, 인간의 상태는 처음보다도 더 나빠질 것이다. 현재는 사유재산의 존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아주 제한된 기인주의를 발전시킬 수밖에 없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 아니면 자신에게 정말 적합하고 즐거움을 주는 활동으로서 노동을 선택할 수 있다. 이들은 시인, 철학자, 과학자, 문화인 ― 달리 말해서 자신을 실현시킨 진정한 사람 ―, 그리고 인류 안에서 부분적인 깨달음을 얻은 자들이다. 한편으로는, 사유 재산 없이 항상 굶주리며 가축의 일을 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강압적이고 비합리적이며 굴욕스러운 궁핍의 폭정에 시달린다. 이 가난한 자들 가운데는 품위도, 말의 매력도, 문명과 교양도, 쾌락의 세련미도, 삶의 기쁨도 없다. 이들의 집단적 힘으로 인류는 물질적 번영에서 많은 것을 얻는다. 그러나, 물질적인 결과일 뿐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염려는커녕 자신이 짓밟을 원자에 불과하다.

물론 사유재산이라는 조건 하에서 발생하는 개인주의는 항상, 심지어 훌륭하거나 훌륭한 유형의 규칙이 아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은 교양과 매력이 없어도 여전히 많은 미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진술은 모두 진실이다. 사유재산의 소유는 엄청 자주 극도로 사기를 떨어뜨린다. 물론 그것이 사회주의가 사유재산 제도를 없애고자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재산은 정말로 골칫거리다. 몇 년 전에 사람들은 재산에 의무가 있다고 말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너무 많이 지루하게 말한 탓에 이제는 교회도 말하고 다닌다. 지금도 모든 설교단이 그 말을 듣고 있다. 이는 완벽한 사실이다. 재산에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너무 많은 의무가 있다. 그렇기에 소유란 지루하다. 이는 한 사람에 대한 끝없는 요구, 사업에 대한 끝없는 관심, 끝없는 귀찮음과 관련있다. 재산에 단순한 즐거움이 있다면 견딜 수야 있다. 그러나 그 의무는 참을 수가 없다. 부자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는 이것을 제거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미덕은 쉽게 인정될 수 있기에 많이 후회된다. 우리는 종종 가난한 사람들이 자선에 감사한다는 말을 듣는다.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가난한 사람들 중 최고는 결코 감사하지 않는다. 배은망덕하고 불만스럽고 불순종하며 반항적이다. 이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이들은 자선에 대해, 일반적으로 그들의 사생활을 폭압하려는 감상주의자들의 무례한 시도를 동반한, 터무니없을 정도로 부적절한 부분적 배상 방식이나 감상적인 실업 수당이라고 느낀다. 이들이 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에 감사해야 하나? 이들은 위원회에 앉아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를 알아가기 시작하고 있다. 불만에 대해 말하자면, 그런 환경과 그런 질낮은 삶의 방식에 불만을 갖지 않는 사람은 완벽한 짐승이라는 것이다. 불복종은 역사를 읽은 사람에겐 인간의 본래 미덕이다. 진보가 이루어진 것은 불복종과 반역을 통한 것이다. 때때로 가난한 사람들은 검소하다고 칭찬을 받지마는, 그런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절약을 권장하는 것은 기괴하고 모욕적이다. 마치 굶주린 사람에게 덜 먹으라고 충고하는 것처럼 말이다. 노동자가 검약을 실천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부도덕한 일이다. 사람은 배불리 먹은 동물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어선 안 된다. 사람은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을 거부해야 하며 도리어 도둑질을 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도둑질의 한 형태로 간주하는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구걸하는 것에 대해, 받는 것보다 비는 것이 더 안전하지만 비는 것이 받는 것보다 좋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 배은망덕하고, 검소하지 않고, 불만이 많고, 반항적인 것이 가난한 사람의 실제 성격일 것이며 그 안에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이는 어쨌든 건전한 항의다. 덕이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수는 있지만 칭찬할 수는 없다. 이들은 적과 은밀한 계약을 맺었고 아주 질나쁜 죽에 자신의 천부인권을 팔아 넘겼다. 또한 이들은 매우 어리석어야 한다. 나는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법을 받아들이고 사유재산의 축적을 인정하는 사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자신이 이러한 조건 하에서 어떤 형태의 아름답고 지적인 삶을 실현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법에 의해 삶이 망가지고 추악해진 사람이 어떻게 그 법이 계속되는 것을 묵인할 수 있는지는, 내게는 거의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해설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다. 불행과 빈곤은 절대적으로 타락하고, 인간의 본성을 마비시키는 효과를 발휘하여 어떤 계층도 자신의 고통을 진정으로 의식하지 못하게 한다. 단지 이뿐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이들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 위대한 노동 고용주들이 선동가들에게 반대하는 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실이다. 선동가는 공동체의 완벽하게 만족하는 계층으로 내려와 그들 사이에 불만의 씨앗을 뿌리고 간섭하는 성가신 사람들이다. 이것이 선동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이들 없이는 불완전한 상태에서 문명을 향한 진보는 없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노예 제도는 노예들의 어떤 행동의 결과도 아니었고, 심지어 그들이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그들의 어떤 명시적인 욕망의 결과도 아니었다. 노예제는 전적으로 노예나 노예의 소유주도 아닌, 문제와 실제로 관련이 없는 보스턴(Boston)과 다른 곳의 몇몇 선동가들의 엄청난 불법적인 행위를 통해 진압됐다. 의심할 여지 없이, 모든 일을 시작한 것은 횃불에 불을 붙인 폐지론자들이었다. 이들이 노예들로부터 별 도움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동정심조차 받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은 기이하다. 남북전쟁이 끝날 즈음 노예들이 자유를 찾았을 때, 자신들이 정말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져서 굶어 죽을 자유도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이들 중 많은 자들이 새로운 상황을 몹시 후회했다. 프랑스 혁명 전체에서 사상가들에게 가장 비극적인 사실은,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가 여왕이라는 이유로 참살된 것이 아니다. 바로, 방데(Vandée)의 굶주린 농부가 끔찍한 봉건제라는 대의를 위해 자발적으로 죽음에 나갔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극적인 것이다.

어떤 권위주의적 사회주의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현 체제 하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자유와 표현, 행복을 누리는 삶을 영위할 수 있지만, 산업 병영 체제나 경제적 폭정 체제 하에서는 누구도 그러한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공동체의 일부가 실질적으로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실로 유감스럽다. 그러나 전체 공동체를 노예화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제안하는 것은 유치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일을 선택하는 데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어떤 형태의 강제도 개인에게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이 있다면 그 노동은 그에게 좋지 않을 것이고, 그 노동 자체도 좋지 않을 것이며, 타인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한 노동이란 단순히 모든 종류의 활동을 의미한다. 나는 오늘날의 그 어떤 사회주의자도 "조사관이 매일 아침 각 집에 전화를 걸어서 각 시민이 일어나서 8시간 동안 육체 노동을 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라고 진지하게 제안하리라고 조금도 생각지 않는다. 인류는 그 단계를 넘어, 아주 대놓고 범죄자라고 부르기로 자처한 사람들을 위해 그런 삶을 따로 간직해 둔다.

그러나 나는 내가 접한 많은 사회주의적 견해가 실제 강요는 아닐지라도 권위에 대한 생각으로 더럽혀진 것 같다고 고백하겠다. 물론 권위와 강요는 논외다. 모든 연합은 전적으로 자발적이어야 한다. 인간이 괜찮다는 것은 자발적인 연합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제 발전을 위해 사유재산의 존재에 어느 정도 의존하고 있는 개인주의가, 그런 사유재산의 폐지에 따라 어떻게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바이런(Byron), 셸리(P. B. Shelley), 브라우닝(Browning), 빅토르 위고(Victor Hugo), 보들레르(Baudelaire) 등과 같이 사적 수단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개성을 어느 정도 완전히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들 중 단 하루도 고용된 사람은 없었다. 이들은 가난에서 벗어났다. 이들은 엄청난 이점을 가졌다. 문제는 그러한 이점을 제거하는 것이 개인주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의 여부다. 빼앗겼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개인주의는 어떻게 될까? 어떤 이점이 있을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것이다. 새로운 조건 하에서 개인주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훨씬 더 섬세하고, 훨씬 더 강화될 것이다. 나는 내가 언급한 그런 시인들의 상상으로 실현된, 위대한 개인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 전반에 잠재되어 있고 잠재력이 있는 위대한 실제적 개인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사유재산의 인정은 사람을 자신이 소유한 것과 혼동함으로써 개인주의를 진정으로 해치고 모호하게 만든다. 사유재산은 개인주의를 완전히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 사유재산은 성장이 아닌 이익을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요한 것은 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중요한 것은 존재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사람의 진정한 온전함은 그 사람이 무엇을 가졌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떠한 자인가에 달려 있다. 사유재산은 진정한 개인주의를 짓밟고 거짓된 개인주의를 세웠다. 이 거짓된 개인주의는 공동체의 한 부분을 굶주리게 하여, 개인이 되는 것을 막았다. 실제로, 인간의 인격이 그의 소유물에 완전히 흡수되었기에, 영국의 법은 항상 인간의 재산에 대한 범죄를 신체에 대한 범죄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재산은 여전히 완전한 시민권의 시험이다. 돈을 버는 데 필요한 산업도 사기를 아주 떨어뜨리고 있다. 재산이 엄청난 구별, 사회적 지위, 명예, 존경, 칭호 및 기타 즐거운 것들을 부여하는, 우리와 같은 사회에서, 인간은 천성적으로 야망을 가지고 이 재산을 축적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지치고 지루하도록 계속하며, 자신이 원하거나 사용하거나 즐길 수 있거나 알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얻은 후에도 오랫동안 이것을 쌓는다. 사람은 재산을 확보하기 위해 과로로 자살할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재산이 가져오는 막대한 이점을 고려할 때, 이는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점은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훌륭하고 매혹적이며 유쾌한 것을 자유롭게 개발할 수 없는 틈새에다가 억지로 집어넣어 삶의 진정한 즐거움과 기쁨을 놓치게 만드는 토대 위에, 사회가 건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회의 사람은 매우 불안정하다. 엄청나게 부유한 상인은 삶의 모든 순간에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 거의 자주 ― 휘둘릴 수 있다. 바람이 좀 많이 분다거나 날씨가 갑자기 변하거나 몇몇 사소한 일이 생기면 배가 침몰하고 추측이 빗나가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완전히 떨어진 가난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제 자신 외에는 어떤 것도 사람을 해칠 수 없어야 한다. 어떤 것도 사람을 강탈할 수 없어야 한다. 사람이 진정으로 가진 것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그 밖에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어야 한다.

사유 재산의 폐지와 더불어 우리는 정말로 아름답고 건강한 개인주의를 갖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물건과 그 상징을 모으는 데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이들은 살 것이다.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한다. 그 뿐이다. 예술의 상상력이 풍부한 면을 제외하고는 개성의 온전한 표현을 본 적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실제로는 그런 적이 없다. 몸젠(T. Mommsen)은 카이사르(Caesar)가 온전하고 완전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비극적으로 얼마나 불안정했던가!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이 있는 곳마다 권위에 저항하는 사람이 있었다. 카이사르는 매우 완벽했지만 그의 완벽함은 너무 위험한 길을 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완벽한 사람이었다고 르낭은 말한다. 그렇다. 위대한 황제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끝없는 요구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제국의 부담에 짓눌려 비틀거렸다. 그는 한 사람이 그 거인과 너무 거대한 별의 무게를 견디기에 얼마나 부적절한지를 의식하고 있었다. 내가 말하는 완전한 사람은, 완전한 조건에서 발전하는 사람다. 다치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불구가 되지 않고, 위험에 처하지 않은 사람. 대부분의 성격은 반역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힘의 절반은 마찰에 낭비되었다. 예를 들어, 바이런의 성격은 영국인의 어리석음, 위선, 속물주의와의 싸움에서 끔찍하게 낭비되었다. 그러한 전투가 항상 힘을 강화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약점을 과장한다. 바이런은 자신이 우리에게 줬을 수도 있는 것을 결코 우리에게 줄 수 없었다. 셸리는 더 잘 탈출했다. 바이런처럼 그는 가능한 빨리 영국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다. 영국인들이 그가 진정으로 위대한 시인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그들은 그에게 이빨과 못을 박아 들이대고, 가능한 그의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에서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어느 정도 도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셸리에게서도 때때로 반항의 분위기가 너무 강하다. 완전한 인격의 특징은 반항이 아니라 평화다.

우리가 놀라운 것을 볼 때, 곧 인간의 진정한 성격이 될 것이다. 꽃처럼 또는 나무처럼 자라듯,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자랄 것이다. 이는 조화로울 것이다. 결코 논쟁하지 않을 것이다. 물건을 증명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식에 몰두하지 않을 것이다. 지혜가 있을 것이다. 그 가치는 물질적인 것으로 측정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을 가질 것이며, 그것에서 무엇을 가져가든지 그것은 여전히 가질 것이다. 그것은 항상 다른 사람들과 간섭하거나 그들에게 자신처럼 되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다를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이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우리를 돕듯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간섭하지 않을 것이지만 모두를 도울 것이다. 사람의 성격은 매우 훌륭할 것이다. 그것은 아이의 성격만큼이나 훌륭할 것이다.

인간이 원한다면 기독교가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덜 확실하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과거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며 일이 일어났는지 일어나지 않았는지 신경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법 외에는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권위도 아니고 그 자체의 권위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을 강화하려는 사람들을 사랑할 것이고, 이들에 대해 자주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 중 그리스도는 하나였다.

고대 세계의 문 위에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쓰여졌다. 새로운 세계의 문 위에는 너 자신이 되라라고 쓰여질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단순히 너 자신이 되라였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이다.

예수가 가난한 자에 대해 말했을 때, 단순히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의미했다. 마찬가지로 부자에 대해 말했을 때에도, 단순히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키지 못한 사람을 의미했다. 예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유 재산의 축적을 허용하는 공동체에서 옮겨 왔고, 예수가 전한 복음은 그러한 공동체에서 사람이 부족하고 건강에 나쁜 음식으로 먹고 살고, 남루하고 건강에 해로운 옷을 입는 것이 이롭다는 것이 아니었고, 건강하고 쾌적하며 품위 있는 환경에서 사는 것이 해롭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한 견해는 그 당시에는 틀렸을 것이고, 물론 지금과 영국에서는 훨씬 더 틀렸을 것이다. 인간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생활에 필요한 물질적 필수품이 더욱 중요해졌고, 우리 사회는 무한히 더 복잡해지고 고대 세계의 어떤 사회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사치와 빈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수의 뜻은 이것이었다. 예수는 인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훌륭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 인격을 갈고 닦아 너희 자신이 되어라. 너희 완벽함이 네 밖에 있는 것을 모으거나 갖는 데 있다고 상상하지 마라. 너희 완벽함은 너희 안에 있다. 깨달을 수만 있다면, 너희는 부자가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부는 빼앗길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부는 빼앗길 수 없다. 네 영혼의 창고에는 빼앗을 수 없는 무한히 귀중한 것들이 있다. 그러니 네 밖에 있는 것들이 너희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네 삶을 만들어 나아가도록 노력하여라. 예수가 가난한 사람이 반드시 선하다거나 부유한 사람이 반드시 나쁘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계급으로서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낫고, 더 도덕적이고, 더 지적이고, 더 예의바르게 행동한다. 가난한 사람은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다. 그것이 가난의 비참함이다. 예수가 말하는 것은,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것이나 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통해 완전함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에게로 온 부유한 청년은 국가의 법이나 종교의 계명을 어기지 않은, 철저히 선량한 시민으로 대표된다. 그 청년은 그 비범한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에서, 매우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너는 사유 재산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은 너의 완전함을 깨닫는 데 방해가 된다. 그것은 너를 끌고 가는 짐이다. 네 인격에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 네가 정말로 누구인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네 바깥이 아니라 네 안에 있다."[1]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같은 말을 한다. 그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이 되라고, 항상 다른 일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다른 것들이 무슨 상관인가? 인간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그들이 세상에 나가면 세상은 그들에게 반대할 것이다. 이는 불가피하다. 세상은 개인주의를 싫어한다. 그러나 이는 저들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침착하고 자기중심적이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 겉옷을 가져가면 그에게 겉옷을 주어야 한다. 이는 물질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한다면 그에 응수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사람들이 한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들은 그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 그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일 뿐이다. 여론은 전혀 가치가 없다. 사람들이 실제 폭력을 사용하더라도 자신의 차례에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신을 남들과 동일한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감옥에서도 꽤 자유로울 수 있다. 사람의 영혼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 인격은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는 평화로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을 간섭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인격이란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로 항상 평가될 수는 없다. 사람은 법률을 지키면서도 무가치할 수 있다. 사람은 법률을 어길 수도 있지만 괜찮을 수도 있다. 사람은 나쁜 일을 하지 않고도 나쁜 사람일 수 있다. 사람은 사회에 대해 죄를 범하면서도 그 죄를 통해 자신의 참된 완전함을 깨달을 수 있다.

주석[편집]

  1. 마르코의 복음서 10장
    1.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3.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남을 속이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여라.' 한 계명들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
    4. 그 사람이 "선생님,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예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6. 그러나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
    7.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하고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9.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10. 제자들은 깜짝 놀라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11.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똑바로 보시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12. 그 때 베드로?(본래 어부였으나 예수를 만난 후, 생업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3.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14.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15.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도보시오[편집]

Creative Commons License
퍼블릭 도메인
이 문서는 저작권 제한 없이 자유롭게 사용 가능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저작자가 저작권 제한이 없음을 명시한 경우이거나, 저작권의 보호기간이 지났거나, 기타 사유로 저작권 보호를 받지 않는 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