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독 (2018년) ― 니체의 철학과 연관하여 ―
- 각 언어 및 국가별 제목
- 한국어: 언더독
- 영어 (미국): A Dog's Courage?(왜 단수형이 쓰였는진 모르겠다. 한편, 여기선 이름이 다들 개명을 당해서 뭉치가 제이컵(Jacob), 밤이가 켈리(Kelley), 짱아는 알렉스(Alex. 전혀 안 어울리게도 엄청나게 가래 끓는 목소리다.), 아리는 도리스(Doris), 까리는 제이슨(Jason. Boris여도 라임은 들어맞았을 텐데 말이다.), 개코는 토니(Tony. 목소리가 연하고 싹싹한 맛이 있다.), 토리는 트레빈(Trevin. 듀오링고의 주니어의 목소리랑 닮았다.), 토리아빠는 에드워드(Edward), 토리엄마는 셜리(Shirley), 봉지는 에디(Eddie), 샤말란은 조너선(Jonathan), 사냥꾼은 마크(Mark)다. 교차검증되었다.)
- 영어 (미국 외): Underdog?(여기는 한국어 이름을 그대로 썼지만, 로마자 표기가 특이하다. Moongchi, Jjangah, Cari, Tari, Bang-wool이라고 썼다. 나머지는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옳게 쓰였다.)
- 프랑스어: Nous, les chiens...?(직역하면, '우리, 개들...'이다. 포스터도 그렇고 이 제목에 쓴 글씨체가 그저 단순한 세리프라는 것도 애상적 분위기를 풍겨서 위화감이 든다만. 게다가 설명이랍시고 적어둔 게 'Amis des hommes, fidèles, abandonnés ― 사람의 친구들, 충직했지만 버려진(직역하면 뭐 대충 이렇다)'인 것도 그렇고.)
- 중국어: 萌犬流浪記(Mengquanliulangji)?(맹견유랑기; 萌(싹 맹; meng) 자가 중국 인터넷 속어로서의 뜻이 맞다면 萌은 '귀엽다'라는 뜻으로 ― 일본어의 萌え(모에, moe)에서 왔다고 하는데 ― 의역한 제목은 '커여운 댕댕이들의 유랑기'가 된다. 보통은 민둥어(Min dong)나 와샹어(Waxiang)가 아니고서야 대체로 '犬'(개 견, quan)자가 아니라 '狗'(개 구, gou)자를 쓴다는 점을 생각하면 좀 특이하다. 게다가, 고전 소설도 아니고 제목에다가 '記'(기록할 기, ji)라니. 한편, 여기는 등장인물의 한국어 이름을 음역했다. 그래서 뭉치는 萌奇(Mengqi)다.)
- 페르시아어: شجاعت یک سگ(Šajâ'ate yak sag)?(미국판 제목(A Dog's Courage)을 직역했다. 다시 영어로 직역하면 'Courage of one dog'이다. 여기는 특이하게 뭉치에 한해 한국어판 이름과 미국판 이름을 혼용한다. 즉 극초기에는 뭉치가 자기 소개를 '뭉치'라고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제이컵이라고 불린다. 나머지는 미국판 이름을 그대로 쓴다. 성우 연기는 죄다 젬병인데다 ― 특히, 봉지는 엄청난 골초가 되었다 ― 페르시아어를 몰라서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만.)
- 일본어: 捨て犬(Sute inu)?(한국어로 의역하면 '버려진 개' 또는 '유기견'으로, '언더독'을 의역한 제목이다. 이름은 모두 한국어 이름을 그대로 썼다. 즉, ムンチ(Munchi, 뭉치), パミ(Pami, 밤이), チャンア(Chan'a, 짱아), ゲコ(Geko, 개코), アリ(Ari, 아리), カリ(Kari, 까리), トリ(Tori, 토리).)
- 베트남, 인도네시아: The Underdog
알림[편집 | 원본 편집]
이 문서는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언더독에 관한 비평문이다. 행여나 꼼수로 '극장에서 절찬 상영중'이란 문구를 내걸고 바~로 VOD 직행시켜버린, 같은 이름을 달고 나온 디즈니의 개좆망 신발닦이(Shoeshine) 실사 영화를 찾으러 왔다면 꺼져라. 그딴 걸 사느니 차라리 천원 주고 이 영화를 사는 게 낫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구매가가 저평가됐다고 생각한다.
이 문서는 이 영화를 알리고 비평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기에 내용 중간중간에 내가 개입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비평의 목적이 달성되고, 또한 네가 여기에 깊이 빠져들어 감정이입을 한다거나?(겉보기 주인공은 대략 여섯 내지 열 정도 된다만 실제로는 관객들이 주로 감정이입하는 대상은 사건의 중심에 놓인 '뭉치'다. 나도 그 때문에 객관적 시점으로 비평하는 데 조금 어려웠다.) 비평을 잊어 버리면 안 되니깐.?(이것을 소격 효과, 또는 낯설게 하기나 소외 효과라고 하는 거다.) 설마 고전소설에서 서술자의 개입을 본 적도 없는 건 아니지? 그래도 비평은 객관성과 주관성의 조화이니 내용의 묘사는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짧은 호흡의 문장에 어연간하면 하드보일드?(Hard-boiled. 20세기 초 미국에서 발생하여 유행한 사실주의 문학 분류. 주로 탐정 소설에서 유행했는데, 섹스나 폭력 등의 말초신경자극적 소재들을 다루면서도 짧고 무감정하며 냉철한 서술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예로, 조세희의 단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의도적으로 이 문체가 자주 쓰였고,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도 이 문체를 즐겨 썼다.) 문체로 쓰고, 나의 개입은 약간 긴 문장으로, 아무런 표지도 없이 끼어들 것이다.
※ '언더독'(Underdog)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없지만, 우리말샘의 전문가 감수 정보에 따르면, '외국 프로 레슬링에서 상대의 목을 공격하는 기술 가운데 하나. 상대의 양팔을 잡아 뒤로 돌린 뒤 바닥에 누워서 상대의 등이 바닥에 닿게 내리치는 기술'이라고 하며 사회학 용어로는 '객관적인 전력이 열세여서 경기나 싸움, 선거 따위에서 질 것 같은 사람이나 팀'이라고 하며 여기서 파생된 '언더독 효과'는 이런 언더독들이 동정표를 받는 현상을 말한다. 또한 '언더독의 반란'은 언더독이 역전을 하는 상황을 말한다. 그 외, 언더독은 사회과학적으로는 '사회적 약자', 현재 한국에서는 불법인 투견에서는 '깔리는 개'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반의어는 오버독(Overdog) 또는 톱독(Topdog), 이 역시 투견 용어로는 '깔아버리는 개'.
시놉시스[편집 | 원본 편집]
- 한국어
- 하루아침에 운명이 바뀐 강아지 ‘뭉치’는 우연히 만난 거리 생활의 고참 ‘짱아’ 일당을 만나 목숨을 구하게 된다. 차츰 ‘짱아’ 무리의 스트릿 라이프에 적응하던 찰나 그들의 소중한 아지트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고, 마침내 그들은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한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하는데...
- 영어 (미국)
- Jacob, a feisty and playful dog abandoned by his owners joins a pack of strays and embarks on a journey filled with fun adventures and life lessons in their pursuit to find a new and loving home.
- (주인에게 버려진, 활달한 장난꾸러기 개, 제이컵?('뭉치'의 개명된 이름이다.)은 유기견 무리에 끼어, 아늑한 새 터전을 찾기 위해, 유쾌한 모험과 이들의 추구 속 삶의 교훈으로 가득 찬 여정을 떠난다.)
들어가기에 앞서서[편집 | 원본 편집]
이 문서는, 부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 모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렇기에 니체의 철학과 사상, 니체의 용어, 니체식 비유적 표현 등이 자주 사용될 예정이다. 그렇기에 해설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싶다면 니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아 두는 것이 좋다. 니체의 주요 저서 가운데, 입문서로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가 있고, 대표작인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Thus spoke Zarathustra)는 니체의 사상을 집약한 데다가 온갖 비유적 표현으로 꾸며져 있기에 좀 나중에 읽는 것을 추천하지만, 어린이도 이해하기 쉽게 만화책으로 나온 것도 있으니 그걸 읽어도 좋다. 그리고 니체의 용어들은 대부분 표준국어대사전에 검색해도 나오지만, 뜻풀이가 너무 엉망이다. 특히 '초인'과 '니체이즘(니체주의, 초인주의, 초인철학)' 항목은 도저히 봐줄 수가 없다.
니체의 철학 해설[편집 | 원본 편집]
니체의 철학은 실존주의 철학 중 하나로, 자신의 지식과 힘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끊임없이 자신만의 목적지를 정하고 거기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을 위한 철학이다. 예컨대, 마라토너나 국가대표 운동선수를 생각해 보자. 마라톤을 처음 시작한다면 완주가 목표일 테고, 국가대표는 당연히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목표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지식과 힘을 낭비하는 것이다. '이만하면 됐겠지' 하고 도중에 쉬어 버리면 다들 거기서 멈춰 버리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었다고 해도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려고 한다. 마라토너는 1등으로 완주하거나 신기록을 세우려고 할 것이고, 국가대표도 다음 대회에서 금메달을 계속 따고 싶어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계속 끊임없이 노력할 때마다 자신의 가치가 올라가게 되는데, 바로 이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해 내는 것이 실존주의 철학의 본질이다. 그리고 니체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함에서 이를 좌절시키는 경쟁자가 있더라도 그 경쟁자를 경멸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라이벌의 존재가 오히려 자신의 가치 형성에 ― 가치란 상대적인 것이므로 상대방의 존재가 있어야만 자신의 가치가 매겨질 수 있기 때문에 ―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약자들도 경멸하거나 짓밟아서는 안 되는 존재이며, 니체는 오히려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약자들을 키워내 자신과 맞붙게 하고 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 중요한 이야기므로 여러 번 말할 테지만, 니체는 '강자를 넘어서려는 의지'를 찬미한 것이지 강자를 찬미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니체가 경멸한 것은 '노예도덕'일 뿐, 약자를 경멸하지는 않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여동생인 테레제 엘리자베트 알렉산드라 푀르스터-니체가 관심 좀 끌어보겠다고 니체의 저작들을 왜곡하여 나치즘에 이용했기 때문에 이에 관한 오해가 많으나, 니체는 반유대주의, 국수주의, 민족주의를 모두 배격한 자이며, 나치즘은 니체에게 데카당(décadent), 즉 퇴폐적인 사상으로 니체가 주장한 사람들의 기본적인 의지인 '힘에의 의지'를 억누르고 '노예도덕'을 강화할 뿐이다.
- 군주도덕과 노예도덕 (Herrenmoral und Sklavenmoral; Master morality and Slave morality)
- 니체는 언젠가 이런 비유를 든 적이 있었다. "포식자와 피식자가 만났을 때, 피식자는 포식자를 보고 '악하다'라고 생각하지만, 포식자는 피식자를 보고 '좋다'라고 생각한다." 즉, 약자는 자신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을 선악의 대립으로만 구성하려고 하고, 강자는 이를 자신만의 기준으로 '좋음'과 '안 좋음'으로 나눈다. 여기서 약자의 '선악의 이분법적 대립'이, 우리가 흔히 '도덕'(Moral)이라고 하는 것인데, 니체는 이런 '약자 중심의 도덕'을 비난하였다. 왜냐하면 '약자 중심의 도덕'은, 기독교의 교리가 그렇듯이, 무조건적으로 사랑과 평화와 양보, 배려 등을 강요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기독교인들이 기도할 때, '우리는 죄 많은 백성들이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따위로 기도하는 것 등을 가리킨다.) 조장하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니체는 이 '약자 중심의 도덕'을 '노예도덕'이라고 지칭하였다. 이에 반대되는 것이 '군주도덕'인데, 군주도덕은 위에서 말한, '자신만의 기준으로 좋고 안 좋음을 구분하고 남을 지배하는 권력을 행사하면서, 그 기준에 맞게 사는 도덕'을 말한다. 그러나, '군주도덕'은 '노예도덕'과는 달리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를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 힘에의 의지 (Wille zur Macht; 권력에의 의지, 권력의지; Will to power)
- 찰스 로버트 다윈이 '생존 경쟁'을 주장하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살려는 의지'를 주장할 때 ― 니체의 이 사상이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마는 ― 니체는 이에 반하는 '힘에의 의지'를 주장했다. 앞선 두 주장은 말 그대로 자기 자신과 개체군의 무궁한 존속을 위한 경쟁과 의지를 뜻하지만, '힘에의 의지'는 강자를 넘어서고 창조하고자 하는 의지(Wille, will)를 뜻한다. 염세주의자인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더 높은 것을 갈망하게 하여 삶을 고통스럽게 한다고 했지만, 니체는 고통도 삶의 일부로써 즐겁게 받아들일 대상이라고 했기에 둘이 말하는 의지는 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군주든 노예든, 심지어 식물에게도 힘에의 의지가 있다고 니체는 바라보았으며, 이 의지가 존재의 가장 심오한 본질이자 삶의 근본 충동이라 하였다. 당연히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약자가 강자를 넘어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되려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생존 경쟁'이나 '살려는 의지'와는 반대되는 주장이다. 그래서 니체는 다윈의 '생존 경쟁'을 영국적이라며 심드렁하게 바라보았다.
- 한편, 이 말이 강자가 약자를 철저하게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주장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니체가 찬미한 것은 '군주도덕'과 '강자를 넘어서려는 의지'이지 군주 같은 강자가 아니다. 아무리 최고 권력을 가진 이도 힘에의 의지를 버릴 수 없어 더더욱 높은 권력을 바라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오히려 약자인 라이벌을 키워서 자신과 대결하게 하고, 그 라이벌을 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 또한, 옛날에 니체의 저서로 알려져 있었던 '권력에의 의지'라는 책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여동생인 테레제 엘리자베트 알렉산드라 푀르스터-니체가 자신의 반유대주의와 민족주의, 파시즘에 따라 니체의 사상을 왜곡하고 프리드리히의 이름을 참칭하여 (프리드리히의 사후에) 출판한 위서로 판명났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니체가 말한 '힘'이라는 단어는 독일어로 Kraft와 Macht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말 그대로의 원시적인 힘, Macht는 극복과 창조를 위한 힘이라는 차이가 있다.
- 영원 회귀 (Ewige Wiederkunft; 영겁 회귀; Eternal return)
- 우주와 시간은 순환하는 모양을 이루고 그 안에서 (동일한) 삶은 되풀이된다는 니체의 중심적인 사상이다. 자칫하면 허무주의로 빠질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기에, 니체의 서사시인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도 니체의 분신(分身)인 자라투스트라조차도 이를 고민하다가 굉장히 괴로워했다. 영원 회귀는 위버멘슈가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를 극복한 '가장 추악한 사람'이 되어 중력의 영을 이기고서 하는 말 가운데 '이것이 삶이런가? 좋다. 그럼 한 번 더!'가 이 사상을 잘 말해준다.
- 만일 너도 영원 회귀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매 순간마다 이 점만 잘 기억해두길 바란다.
내가 지금 하려는 행동이 전생에 저지른 최악의 실수가 아닐까?
- 위버멘슈 (Übermensch; 초인, 극복인; Superman)
- 영어의 'Super-' 또는 'Over-' 접두사에 대응되는 독일어의 'Über-'와 사람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 'Mensch'의 합성어다. 그러나 이것이 DC 코믹스의 '슈퍼맨'과 같은 초인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니체의 위버멘슈가 초월한(over) 대상은 선악으로 나눠진 기성 도덕과 비극적인 상황으로, 이것을 넘어서 자신만의 가치와 자신만의 기준을 창조하고 그 가능성을 극한으로 실현한 자가 바로 위버멘슈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위버멘슈에 가까운 인물은 '렉스 루터'다. 농담 아니다.
- 레츠터 멘슈 (Letzter Mensch; 인간말종, 종말의 인간; Last man)
- 위버멘슈에 반대되는 인간으로, 순간순간의 이익과 쾌락과 무사태평하고 소박한 삶만 좇는 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소시민같이 하루하루 정해진 일만 하다가 적은 돈을 받아도 크게 불평하지 않고, 문제점이나 모순을 알고도 바꾸려고 행동하지 않는다.
- 아모르 파티 (Amor Fati)
- 라틴어로 '운명의 사랑'을 나타내는 아모르 파티는, 이대로만 들으면 마치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와 비슷해 보이지만,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다소 체념적으로 하는 말이라는 데서 니체의 아모르 파티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아모르 파티는, 자신에게 운명이 찾아왔을 때에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순응하고 체념하려 하지 말고) 운명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겨내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모르 파티는 "피할 수 없다면, 싸워야죠."에 더 가깝다.
- 세 가지 변화
- 니체가 자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사람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말했을 때, 사람은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단계를 거친다.
- 낙타는 사람의 짐짝을 등에 한가득 싣고 사막을 걸으면서도 주인의 말에 나귀처럼?(독일어로 나귀의 울음소리인 I-ah가 독일어로 '네'를 뜻하는 Ja와 발음이 비슷한 데서 유래되었다.) 순종한다. 즉, 낙타와 나귀는 노예와 기독교적 도덕에 빠진 사람에 대한 비유다.
- 사자는 초원의 왕으로서 군림하며 남의 명령 따위 듣지 않는다. 사람이 노예에서 위버멘슈로 다가가는 단계의 가운데에 놓인 상태다. 사자는 용의 도전을 받게 되는데, 용은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당위'를 상징한다. 그리고 용의 금빛으로 빛나는 비늘은 당위의 권위를 상징한다. 사자는 용의 도전을 얼마든 물릴 수 있으나 계속된 도전에 지쳐 버릴 수도 있다.
- 어린아이는 '웃는 사자'라는 과도기를 거쳐 최종적으로 도달한 위버멘슈다. 어린아이는 비도덕적인 일도 서슴없이 하며?(툭하면 남 눈치도 보지도 않고 울어대서 부모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까지 귀 아프고 난감하게 하는 상황이나 벽지에다가 크레파스로 낙서를 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쉽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행한다.?(이것이 순자의 성악설의 주장과 부분적으로 통하는 데가 있는데, 순자의 성악설이란 사람은 생리적 욕구를 따라 행동하고자 하고 그 생리적 욕구를 좇는 것은 나쁘므로,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는 주장이다. 모든 사람은 어렸을 때 이렇게 비도덕적으로 생리적 욕구만 좇아 행동하지만, 부모와 사회의 지도에 따라 자신의 욕구와 행동을 점차 절제하게 된다. 이는 선악의 대립 구도 자체를 부정한 니체와는 전혀 맞지 않으나, 자기와 타인과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전근대 동아시아 철학에서 중요한 주장 중 하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린아이는 어떠한 고난이 와도 금방 꺄르르 웃어댄다. 마치 파도에 모래성이 무너져도 금방 꺄르르 웃고는 다시 모래성을 쌓는 모습처럼 말이다. 그래서 니체는 사람들에게 어린아이같이 될 것을 주장했다.
아동소설판 서문과 뒤표지, 그리고 일부 해설[편집 | 원본 편집]
- 서문
사회는 여러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경쟁을 합니다.?(살기 위한 경쟁과 창조와 극복을 위한 경쟁을 모두 포함한다. 즉, 찰스 다윈이 주장한 '생존 경쟁'과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가 주장한 '힘에의 의지'를 모두 포괄한다.)
누구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람이 되고 또 누구는 업신여김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언더독은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들을 뜻해요.
여기서는 버려진 개들을 뜻하는 말로 쓰였어요.
버려진 개 뭉치는 또 다른 버려진 개들과 만나게 됩니다.
뭉치는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도, 버려진 다른 개들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기라는 것은 자기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어요.
나는 누구의 부모이거나 친구이거나 주인이거나 형제로 존재합니다.?('색즉시공'을 아는가? '나'라는 존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불교의 사상이다. "아일랜드가 없었다면 영국인들은 아일랜드를 만들어냈을 것이다."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과 잘 들어맞는다. 마치 파동성을 가진 소립자가, 인간의 관측을 통해 입자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면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아는 게 중요해요.
어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 살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생각한 대로 살아갑니다.?(여기서 이 작품의 실존주의성을 알 수 있다. 실존주의란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철학이며,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을 추구한다. 이와는 반대로 사는 대로 생각하는 자들은, 니체가 (수동적) 허무주의자나 인간말종, 종말의 인간이라고 크게 비판한 자들이며, 극단적인 예시로는 좀비 등이 있다.)
뭉치는 어땠을까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 뭉치는 과거에 집착한?(문법상, '집착하는'이 옳음.) 어리석은 행동을 합니다.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그 전 상황만을 고집하는 겁니다.
다른 개들을 통해 뭉치는 비로소 자기도 버려진 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떠돌이 개들을 친구로 받아들입니다.
뭉치는 스스로 먹이를 찾고 스스로 결정을 하는 주인으로 다시 태어납니다.?(《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온 은유적 표현을 빌려 쓰자면, '낙타'가 '사자'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뭉치를 중심으로 펼쳐졌지만, 뭉치와 함께 등장하는 개들 모두가 주인공입니다.
일찌감치 인간 세계를 떠나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밤이를 비롯한 들개들, 다른 개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봉지, 불쌍한 병든 강아지를 그냥 둘 수 없어서 보금자리로 데려가는 짱아와 아리, 까리도.
개들은 서로 도와가며 버려진 개들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개들로 바뀝니다.
뭉치와 개들은 동물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길은 멀고 험합니다.
개들을 추격하는 개농장 사냥꾼과 사냥개들을 피해, 인간이 만들어 놓은 험난한 길을 피해, 때론 의기투합하며 때론 서로 다투며 하나하나 헤쳐 갑니다.
자신들의 삶에 적극적인 선택을 한 개들은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이 말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명언 가운데 하나인,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와 유사하다. 또한 이는 곧 '살아있는 한, 나는 더 강해질 것이다'를 의미한다.)
선택은 의지로 이어지니까요.
온갖 어려움과 방해를 이겨내고 결국 개들은 자유를 찾습니다.
자기를 찾고 자유를 얻는 길, 뭉치 일행이 어려움을 뚫고 얻어낸 그 길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길입니다.
자기를 찾아, 자유를 찾아 달리는 뭉치처럼 세상에 나온 여러분도 힘차게 달리시길 바랍니다.
- 뒤표지
같이 갈래? 더 큰 세상으로!
대가를 치른 자만이 자유를 얻을 자격이 있어.
내가 결정할 수 있어야 내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거야.?(이 역시 마찬가지로 실존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이게 대장이 책임지는 방식이야.?(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용어인 '군주도덕'에 대해 좀 더 직설적으로 다가가고 있다. 대장을 군주로 바꾸어도 상관없다. 군주도덕이란, 자기 긍정과 권력 의지에 충실하고 힘을 획득하여 남을 지배하려는 강자의 도덕이면서도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도덕을 말한다. 책임회피와 책임전가는 노예들이나 하는 짓이다.)
우리 들개들의 방식이기도 하고?(흔히들, 들개들에 대해 일컫는 명칭인, '무법자'를 떠올려 보자. 이들은 도덕과 인간의 법률을 좆으로 여기고(이마누엘 칸트가 이성 뿐만 아니라 도덕도 중요하다고 한 것은, 도덕이 인간과 짐승을 가르는 척도 중 하나라고 여겼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칸트가 말한 도덕과 그 기준은 굉장히 상대주의적인 것이라서, 칸트가 혼전순결과 자위의 금지 등을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현대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니체가 말한 '사자'와 '어린아이'의 중간 쯤 되는 상태에서, 산을 날고 기면서 살고 있다. 사람들에게 잡히는 문제는 별개로 치고, 그저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놈들이다. 이 영화에서 전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을 자유의 대가라 생각해.
그리고
그 대가를 우리 모두 기꺼이 지불할 생각이야.?(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군주도덕'에 관한 또다른 핵심적인 내용이다.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에 자기 스스로가 온전히 그 책임을 다 하는 것 말이다. 이 위에서든, 이 아래에서든간에 자주 말할 말이지마는. 한편 ― 니체와는 다소 반대에 입장에 서있는 실존주의자이기는 하지만 ― 기독교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시인이고 사회비평가이기까지 한,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도 그의 주요 저서인 《일기》에서 '결과적으로 피를 흘리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해방은 고난을 통해서 와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이 구절은 기독교의 세속화와 국가주의화를 비판하고 이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면서 내세운 말이지마는 또한 이를 다른 분야로 일반화하여도 틀린 말은 아니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해방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가?)
누구나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살 권리가 있어.
그건 아무도 막을 수 없어.?(무시무시한 용을 보고도 꺄르르 웃어대는 어린아이를 생각해 보자. 용은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이걸 보고도 그저 커다란 구경거리로밖에 보지 않는다. 마치 어린 헤라클레스가 헤라의 독사를 졸라 죽인 것처럼 말이다. 어린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다. 그것이 비도덕적일지라도 말이다.)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건 권리만이 아니야.
그건 의무이기도 해.
본문[편집 | 원본 편집]
보기 편하게 조금 나누었다. 중제목은 OST 제목에서, 소제목은 원작을 바탕으로 한 아동소설의 차례와 삽입곡인 '지구와 달과 나'에서 따왔다. 예외적으로, '철책을 넘어 그곳으로'는 소설에서의 중제목이고, 그 아래 두 소제목은 영화의 OST 제목이다.
버려진 개[편집 | 원본 편집]
짖지 않는 개[편집 | 원본 편집]
차분한 음악,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 모리스 라벨 작)이 들려온다.
건물들은 높고도 빼곡히 서 있다.
빠르게 지나간다.
중국 배급사인 패션리그의 광고판이 있다.
사드 보복 때문에 한한령 내려져서 개봉 안 될 줄 알았더만, 어찌어찌해서 중국 개봉은 했나보다.
더 많은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다.
그 자리엔 '난장이 일가' 같은 사람들이 살았었을는지도 모른다.
한강을 건너는 전철.
투자자인 IBK 기업은행의 광고판도 보인다.
음악은 파란색 SUV(46러4266)에서 들려온다.
운전자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전화를 건 이는 운전자의 아내 같다.
울먹이며 말하길, 정말 이래도 되는 거냔다.
운전자는 아내를 안심시킨다.
"그게 얘한테 나을 수 있어. 맘껏 달릴 수두 있구..."
그러나 아내는 결국 울어 버린다.
알지 못하겠다.
도대체 이 무슨 일인가?
운전자는 짜증내며 전화를 끊는다.
운전자는 차를 세우고 내린다.
뒷문을 연다.
듬직히 자란, 푸르스름한 털빛의 보더 콜리가?(Border Collie;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지방 사이의 양치기 개(목양견, 牧羊犬)로, 수컷 성견의 키는 50센티미터 내외, 몸무게는 17킬로그램 내외, 영리한 편에 속하며 양치기 개라서 활동적이고 자주 뛰어줘야 한다.) 내린다.
아동소설에서는, 보더 콜리가 아내의 로망이었다고 한다.
개는 꽤 활동적이다.
시끄럽고도 명랑하게 우짖을 만도 하게 생겼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개는 혀만 내밀고 헥헥거릴 뿐이다.
이 개는 짖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목에 무언가를 차고 있다.
운전자는 트렁크에서 사료 포대를 꺼낸다.
'ODOLLDOGGY, 18kg'라고 써 있는데, 이 영화 제작사명이 '오돌또기'다.
운전자는 사료 포대를 들쳐멘다.
두리번거리면서 산을 조금 오른다.
"뭉치, 앉아."
사료 포대를 뭉치의 곁에 내려둔다.
뭉치의 목에 걸었던 것을 풀어준다.
"뭉치야, 이제 맘껏 짖어 봐. 너 이제 자유야."
뭉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기분 좋은 듯한 뭉치의 표정.
운전자는 테니스공을 꺼낸다.
뭉치는 공을 보고 반가운 얼굴이 된다.
공을 물고 싶어 매달리려고 한다.
"안 돼, 기다려."
뭉치의 시점으로 전환.
"기다려."
뭉치는 뒤로 물러선다.
공이 던져지기를 기다린다.
운전자는 테니스공을 멀리 던진다.
뭉치는 공을 쫓아 힘차게 달려간다.
공은 이리저리 튀어다닌다.
그새, 운전자는 차를 타고 토낀다.?(소설에 따르면, 운전자가 뭉치를 버리는 이유는 아내가 출산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찔리는 건 있어선지 뭉치가 달려오는 걸 보고 미안하다고 뇌까리며 가속 페달을 밟는다.)
공을 막 주운 뭉치.
엔진 소리를 듣고 다급히 달려간다.
자길 두고 가는 반려자.
그걸 보고 놀란 뭉치.
자동차를 쫓아 달려가던 뭉치.
크게 넘어져 구른다.
다시 일어선다.
그러나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뭉치의 표정.
결국 자동차 뒤쫓기를 단념한다.
뭉치는 사료 포대 곁으로 돌아와 제 앞에 공을 바로 놓는다.
다소곳이 앉아 운전자가 다시 오기를 기다린다.
카메라는 뭉치에게서 서서히 멀어진다.
그러면서 첩첩산중의 경치를 보여준다.
아마 북한산일 게다.
영봉인지 인수봉인지 헷갈린다만 어쨌든 북한산일 게다.
서울과 고양 사이쯤이겠네.
흰 글씨의 제목, 언더독이 나타난다.
배경은 어두워진다.
떠돌이 개들[편집 | 원본 편집]
화면 전환.
밤이 되었다.
소낙비가 쳐붓는다.
천둥번개가 친다.
뭉치는 천둥소리에 놀랐다.
그러나 여전히 운전자를 기다린다.
뭉치는 고개를 치든다.
빗물이 눈에 떨어졌다.
뭉치는 눈을 부비적한다.
여전히 공을 물고 있다.
멀리서는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마을.
뭉치는 그 마을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우이동일 듯싶다.
맑게 갠 다음날 아침.
뭉치는 기다리다가 지쳤다.
웬 부스럭거리는 소리.
뭉치는 그 소리에 일어나 본다.
꽃밭 쪽에서 나는 소리.
뭉치는 경계한다.
꽃밭에서 나온 이들도 개들이다.
시추?(Shih-tzu/獅子(Shizi), 중국의 견종으로 페키니즈와 티베트의 개를 교잡시켰다. 사자를 닮았대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짱아?(이들의 '짱'이라는 의미랜다.)) 하나, 치와와(아리, 까리)?(Chihuahua, 중앙 아메리카의 고유 견종으로 소형견 중에서는 가장 유명하다. 소설에서는, 뭉치에게 삶이란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거라면서 저들은 쌍으로 버려졌다는 것을 웃으면서 말해준다. 섬뜩하다.) 둘, 도이처 셰퍼훈트?(Deutscher Schäferhund, 독일의 양치기 개라는 뜻으로 군견으로 곧잘 쓰이며 양치기 개답게 자주 뛰어줘야 한다.)(개코?(군견 출신으로, 소설상으로는 강아지 때부터 군견병이 예뻐해 줘서 휴가에서 돌아오면 싸제 음식을 주기도 하고, 다쳤을 때에는 ― 폭발 사고는 아닌 것 같다, 폭발 사고 후에는 안락사 위기에 처해 있었다가 풀려났다고 하니 ― 이 덩치를 데리고 병원을 데려갔고, 제대할 때는 아쉬워 했댄다.)) 하나, 총 넷이다.
내가 이들의 이름을 미리 말하는 이유는, 저들의 이름이 작중에서 안 나오기 때문이다.
그나마 짱아와 개코는 이름이 불리기는 하는데 그 횟수가 적다.
짱아는 아리와 (스포일러)?(이효리)에게 총 2번 불린 게 전부고, 개코는 뭉치에게 한 번 불린 게 전부니.
"개다!"
"딩동댕! 오늘도 한 마리. 여그가 개 버리기 딱 좋은 포인트제."
짱아는, 뭉치 곁에 놓인 사료 포대를 본다.
"요거, 나가 볼 때는 우리한테 신고식하려고 갖다 논 거다."
짱아는 사료에 관심을 보인다.
다른 개들은 뭉치의 냄새를 꼼꼼히 맡는다.
"아파트 냄새!"
"음 그래, 딱 하루 지났군."
정확히 맞혔다.
짱아는 개코에게 사료 포대를 제끼라고 말한다.
개코는 사료 포대를 엎으려고 한다.
뭉치는 말없이 앞다리로 막는다.
"왜 그래?"
뭉치는 머뭇거린다.
결국 말을 하지 못한다.
"니가 요 바닥 룰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나가 딱 하나만 야그해 줄 테니께, 귀 세워."
짱아가 말했다.
"묵을 것이 생기문, 다같이 묵는다. 알아 묵것냐?"
그러나, 뭉치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요거 영 어영부영해 버리구마잉."
짱아는 뭉치가 목에 매고 있었던 것을 본다.
"응? 요거?"
그리고 호기심에 만져 본다.
전기 충격이다.
짖음 방지기였던 것이다.
짱아가 냉소적으로 말한다.
"애기를 아주 그냥 반 벙어리로 맹글어놨어야."
어쨌든 짱아는 말은 못 해도 귓구녁은 뚫려 있겠지 한다.
다시 개코에게 사료 포대를 제끼라고 한다.
엎어진 사료 포대.
넷은 웃으면서 포식을 한다.
뭉치는 이들을 말없이 웃으며 지켜본다.
바로 앉아서 슬픈 표정을 짓는다.
뭉치는 공만 갖고 기다릴 뿐이다.
합류[편집 | 원본 편집]
배불리 먹은 짱아는 뭉치에게 이름을 묻는다.
"뭉치...."
"뭐? 눈치라고?"
너무 작은 대답에 짱아는 가까이 다가가서야 뭉치의 본명을 알게 된다.
"으응, 뭉치. 아따 참말로 흔한 이름이네. 이름에 영혼이 없네? 흐흥."
아리가 웃으면서 말한다.
"귀여운데 뭘? 개 이름이 다 그렇지 뭐."
짱아는 먹을 것도 다 떨어졌으니 자기네를 따라올 테냐고 묻는다.
아리도 자기네 사는 데도 살 만하다며 설득한다.
그러나, 뭉치는 여전히 작은 소리로 말한다.
짱아는 성질이 뻗쳤다.
"아! 크게 말해!"
뭉치는 그제서야 남들 잘 들릴 정도로 말한다.
"기다리라고 했어요...!"
"열녀 났네."
짱아가 말했다.
"네 주인 말은, 널 데리러 다시 온다는 말이 아니라, '살 수 있음 여기서 함 잘 살아봐라', 이 소리여."
뭉치는 여전히 기다리는 것을 고수한다.
짱아는 답다워한다.
"네 주인은 그냥 너여, 너."
그리고 제 무리를 데리고 되돌아간다.
개코가 짖음 방지기를 잘못 밟고 감전된다.
개코는 짖음 방지기에 대고 짖어댄다.
그리고 뭉치를 보고 웃은 뒤 뒤따라간다.
뭉치는 차 엔진 소리를 듣는다.
제 옛 반려자 차인 줄로 알고 그쪽으로 가본다.
그러나 나타난 건 빨간 마티즈다.
거기서 늙고 병든 몰티즈가?(Maltese, 몰타 혹은 멜리타 지역이 원산으로 알려져 있고 활발하며 한국에서 가장 많이 버려지는 개들 중 하나이다. 또한 견유주의자 디오게네스가 배고플 때의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도 인용되었다.) 버려진다.
그걸 본 뭉치는 자신의 상황이 저 몰티즈와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를 평가하다니, 참 끔찍한 상황이다.
짱아 무리도 그걸 본다.
"또야?"
아리와 까리가 먼저 내려가 본다.
짱아가 뭉치에게 묻는다.
"인자 이해가 가냐?"
그러면서 천천히 내려간다.
개코는 뭉치를 달랜다.
"자자자, 어여 가자. 자, 가자."
그러나 여전히 공을 물고 있다.
뭉치는 이들을 따라가 본다.
아리는 이 몰티즈를 '방울이'라고 부르면서 괜찮다고 달랜다.
방울이는 개코의 등에 올라태워진다.
뭉치는 무리와는 조금 떨어져서 뒤따라간다.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충격이 좀 크지?
멀리서 보는 풍경엔 저녁놀이 비치는 바위산과 숲, 그리고 재개발 지역같이 허물어진 마을.
이 마을은 산의 서쪽에 있는 듯싶다.
뭉치는 여전히 공을 문 채로, 이 스산한 마을을 둘러본다.
파리 날리는 쓰레기 더미, 솜 터진 인형, 빨간색 卍 자를 대문에다가 붙인 점집과 폐가 등.
뭉치는 호기심에 고양이 꼬리를 밟는다.
놀란 고양이에게 얻어맞는다.
뭉치는 뒷걸음질 치다가 닭 인형을 밟는다.
'빼애액!'
뭉치는 그 소리에 놀라 줄행랑친다.
개코가 뭉치의 꼬리를 물어 잡는다.
그 탓에 뭉치는 공을 놓친다.
짱아는 서열대로 가고 있다고 말한다.
즉, 이에 따르면 짱아가 고참, 개코가 2위, 그 다음이 아리와 까리, 뭉치는 짬찌다.
봉지와 개 사냥꾼[편집 | 원본 편집]
개코가 갑자기 귀를 세우고 두리번거린다.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 온다.
"숨어!"
다들 숨을 곳을 찾아 흩어진다.
뭉치도 개코를 따라 숨으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공을 놓친 것을 알아차렸다.
뭉치는 튀어가는 공을 주우러 간다.
"뭉치야! 안 돼!"
개코가 외쳤지만, 뭉치는 달려간다.
마을 어디선가 슈나우저?(Schnauzer; 독일 원산의 견종으로, 쥐를 잡는 데 쓰였으며 이빨갈이로 인해 뭔가를 씹고자 하는 성격이 강하고 초기 성장이 빠르다.)(봉지) 한 마리가 달리고 있다.
오토바이에 쫓기고 있다.
오토바이에 탄 이는 곤봉을 펼친다.
때려 잡으려는 것이다.
뭉치는 공을 줍는다.
그러다가 봉지와 부딪힌다.
그러나 공은 놓치지 않았다.
"야, 뛰어!"
뭉치는 오토바이를 본다.
그리고 봉지를 따라 뛴다.
이들은 폐가 지붕 위, 제방, 망한 재래시장을 쏘다니며 쫓긴다.
재래시장에서, 노란색 플라스틱 울타리가 앞길을 막는다.
봉지는 위로 뛰어넘고, 뭉치는 아래로 기어간다.
작은 개는 위로, 큰 개는 아래로.
뭔가 서로 할 일이 바뀐 듯한 느낌이다.
이른바, 거토왜상(巨兎矮象)이라고 할까?
봉지는 재래시장의 샛길로 빠진다.
오토바이에 탄 이의 목표물은 뭉치가 된다.
봉지는 양철 지붕과 기왓지붕에 오른다.
그리고 뭉치와 오토바이에 탄 이가 어딨는지 보며 따라간다.
봉지는 오토바이 탄 이의 뒤를 덮쳐 넘어뜨린다.
넘어지면서 오토바이 탄 이는 헬멧이 벗겨진다.
그이는 눈 주위가 시커멓고 다소 장발이며 걸걸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다.
"아따, 이 자식들. 빠르네, 빨라!"
뭉치와 봉지는 뒤돌아보지 않고 도망친다.
"또 보자!"
그이는 저들에게 음흉하게 웃는다.
둘은 건물 뒤에서 한숨 돌린다.
봉지는 뭉치의 공을 본다.
"야, 그건 뭐냐? 뭐, 산책이라도 나온 거야?"
그러고는 땅 속 냄새를 맡는다.
봉지는 땅을 파헤친다.
뭉치는 공을 문 채로 봉지에게 뭐라고 묻는다.
뭉개진 발음 때문에 봉지가 되묻는다.
"아까 그 사람은 뭐냐구요."
봉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한다.
"개 사냥꾼."
뭉치는 놀라 거듭 묻는다.
"네? 개를 사냥한다구요?"
봉지는 답을 않는다.
땅 속에서 웬 검은 봉지를 꺼낸다.
그리고 뭉치에게 따라오라고 말한다.
뭉치는 잊지 않고 공을 줍는다.
뭉치는 봉지의 뒤를 따른다.
아지트[편집 | 원본 편집]
봉지는, 반쯤 무너진 집 밖에 버려진 냉장고 문을 연다.
그 안엔 비밀스러운 통로가 있다.
둘은 거길 통해 집 안을 들어간다.
뭉치는 통로 끝에서 고개를 든다.
업라이트 피아노에 머리를 부딪힌다.
봉지는 뭉치에게 조심하라고 말한다.
아무도 없는 듯한 반지하의 거실에 들어선 둘.
봉지는 봉지를 내려놓고 둘러본다.
"경보 해제!"
소파 곁의 좌변기, 엎어진 통돌이 세탁기, 장화 두 켤레서 각각 짱아, 개코, 아리와 까리가 튀어 나온다.
"짠!"
뭉치 앞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아리.
뭉치는 아리를 보고 놀랐다.
"많이 놀랐지?"
한편, 봉지는 무심히 2층 계단 위로 올라간다.
개코가 봉지에게 말한다.
"여어, 봉지. 무사귀환이다, 응?"
아리가 말하길, 여기가 아지트란다.
"어이, 신참. 개인행동은 위험하다. 조심하도록."
개코의 말에 뭉치는 머쓱해 한다.
아리와 까리는 방울이를 돌본다.
봉지가 짱아에게 말한다.
"이러고 여기 계속 살 거예요? 이 마을의 버려진 개들은 거의 다 잡혀갔다고요."
짱아는 사람들을 원망한다.
그러면서도 제 곁에 둔 수달 인형을?(달수 인형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두 영화가 같은 제작사 작품이다. 같은 성우이기도 하고) 쓰다듬는다.
개코는 짱아에게 달력 속 전원 풍경을 가리킨다.
그리고 거기 같은 '낙원' 가서 살자고 한다.
짱아는 또 그 소리냐며 그런 '낙원'이 어딨냐고 한다.
개코가 그림에다가 석쇠를 대며 설명한다.
사람은 없고 철망이 쳐진 데라고 한다.
그리고 '무서운 냄새'만 쫓아가면 된다고 한다.
개코의 행동이나 이 대사면 원래 무슨 개였는지, 어디 살던 개였는지, '낙원'이 어딘지, '무서운 냄새'는 또 뭔지 짐작할 만하겠지?
짱아는 개코에게 싱거운 소리만 해댄다고 나무란다.
개코는 참 좋은 곳이라며 아쉬워 한다.
그리고 혼잣말로 조금 무섭긴 하다고도 말한다.
봉지가 말한다.
"잡혀서 죽는 것보다, 한 번 해 보는 게 낫지 않아요?"
짱아는 죽긴 누가 죽느냐고 한다.
방울이를 보던 아리와 까리는 염려스러워 한다.
분위기가 경직된다.
개코는 분위기를 환기를 시키려, 봉지가 가져온 봉지를 연다.
살점이 붙은 뼈다귀가 나온다.
개코는 까리에게 작은 뼈다귀를 밀어 준다.
그러나, 까리는 그걸 물린다.
그리고 제 체격보다 큰 뼈를 문다.
결국 뒷다리를 들고 앞발로 걸어간다.
개코가 뭉치에게 말한다.
"어이, 신참. 이제 그 공 내려놓는 게 어때?"
개코는 뭉치가 물고 있는 공을 빼앗아 서랍장에 둔다.
뭉치는 쩝쩝거리며 아쉬워 한다.
개코는 뭉치에게 한 뼈다귀 하자고 한다.
그리고 다들 고기를 물어뜯는다.
짱아는 오늘은 고기가 부드럽다며 한우인가 보다 하고 감탄한다.
개코는 혼잣말로 족발이라고 말한다.
한편 방울이는 먹질 못한다.
그걸 본 봉지는 힘들게 병든 애를 왜 데려 왔냐고 한다.
짱아는 그걸 듣고 과거는 잊었느냐며 봉지의 과거 얘기를 한다.
1년 전, 봉지는 봉지에 담겨 버려졌었다.
추위와 비바람에 떨며 재채기를 하고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봉지를 짱아가 발견하고 데려온 것이었다.
봉지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혀로 코를 핥는다.
뻘쭘해진 봉지.
봉지는 추위 탓을 한다.
그리고 뭉치를 보고는,
"쟤는 달리기는 제법 하던데...."라고 말 끝을 흐린다.
짱아는 뭉치가 세상물정을 모르는 게 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앵벌이엔 딱이란다.
끝에는 아이돌같이?(마침 뭉치의 성우가 엑소의 D.O.(도경수)다. 연기는 꽤나 하던데) 잘생겼잖느냐고 덧붙인다.
한편, 뭉치는 오줌을 싸려고 다리 한쪽을 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짱아에게 걸리고 만다.
짱아는 화를 내며 화장실의 위치를 가리킨다.
그리고 아직도 똥오줌도 못 가리는 개들이 있다고 투덜댄다.
뭉치는 변깃물이 안 내려간다고 말한다.
짱아는 물 끊긴 지 오래니 냅두라고 말한다.
뭉치는 변기를 깨어 먹는다.
짱아의 뭉치 평가, "사고뭉치네."
다음날, 개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간다.
병든 방울이와 다른 일로?(그 사냥꾼을 또 농락하고 고기 담긴 봉지를 가지러) 먼저 간 봉지를 제외하고 말이다.
뭉치는 방울이에게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한다.
마을로 내려간 개들.
개코는 짱아에게 한 가게를 가리킨다.
"대장. 저기 어때?"
"그 집 못 쓰겠더라. 소금, 설탕에 MSG?(글루탐산 나트륨. 다시마 등에 많이 들어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사탕수수 등을 발효해서 만든다.)만 듬뿍. 이름만 맛집이여"
짱아는 말란이네 가게로 가자고 한다.
짱아는 갈빗집 아저씨가 숯을 다루고 있는 걸 본다.
다른 개들에게 조용히 가자고 한다.
갈빗집 아저씨는 뭉치를 보고 숯을 던진다.
"저리 가!"
맞지는 않았다.
개코가 되돌아와 뭉치에게 가자고 한다.
갈빗집 아저씨는 숯을 하나 더 던진다.
개코에게 맞았으나 개코는 신경쓰지 않는다.
추어탕집의 뒷문에 닿은 이들.
짱아는 먼저 나서고 설치지 말랜다.
"옛썰!"
개코가 거수경례를 하며 말했다.
짱아가 문을 두드린다.
뭉치를 뺀 다른 개들은 긴장한 채로 섰다.
문을 열며 나온 험상궂은 이는,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든다.
그리고 입으로 '빵야' 소리를 낸다.
거기에 맞은(?) 개들은 넘어진다.
뭉치는 이해 못했다.
"어? 너 누구야? 짜식, 낯가림 하네?"
어눌한 한국어.
이이가 말란이다, 샤말란.
외노자로, 이런 동네 개들에게 먹을 걸 주는 이다.
"많이들 먹어."
샤말란은 이들에게 먹을 걸 내어주고 들어간다.
비록 음식물 쓰레기지만 말이다.
짱아는 뭉치에게 '먹을 것'을 얻는 방법을 가르친다.
"이런 건 싹 넘어져 줘야 좋아하제. 꼬리도 좀 쳐주고! 밥값은 해야 할 거 아녀."
아리는 뭉치에게 괜찮다며 위로한다.
이들은 내어받은 음식을 먹는다.
뭉치는 머뭇거리다가 허겁지겁 먹는다.
사레가 들렀다.
"천천히, 살살 먹어."
아리가 뭉치를 염려한다.
뭉치는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듣고 뒤돌아본다.
옛 반려자의 것과 비슷한 차다.
그 자동차(57거4851)는 마침 그 추어탕집에 주차한다.
뭉치는 그차를 제 옛 반려자의 것으로 오해한다.
운전자는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뭉치도 운전자의 뒤를 따라 들어가, 매달린다.
그이가 뒤돌아봤다.
다른 사람이다.
당황한 뭉치.
가게 주인이 집게로 뭉치의 귀를 잡아당긴다.
또, 뭉치를 후려치려고 한다.
뭉치는 가게 안에서 도망다니며 난동을 피운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다 낯선 사람.
정문에도 사람들이 뭉치를 내려다보며 섰다.
뭉치는 뒷문으로 나간다.
다른 개들도 가게 주인에게 들킨다.
"이게 웬 그지새끼들이야?!"
결국 이들도 도망친다.
쫓는 데 실패한 추어탕 가게 주인은 샤말란을 부른다.
돌아가는 길.
실망감에 축 쳐진 뭉치.
밤이 되어 모두 자고 있다.
뭉치는 방울이의 방울소리에 깨어난다.
방울이가 부들부들 떠는 몸으로 한 발짝씩 내딛는다.
뭉치가 방울이에게 다가간다.
"괜찮아요?"
"나 좀 거기로 데려다 줘.... 우리 엄마가, 나 찾으러 올 거야...."
고민하는 뭉치.
"... 알겠어요."
그러면서도 뭉치는 방울이를 자던 곳으로 밀어준다.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엎드려 잔다.
자기 직전, 뭉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니. 오지 않을 거야.'
영화에서 단 둘 뿐인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뭉치의 결심[편집 | 원본 편집]
뭉치의 결심[편집 | 원본 편집]
다음날 아침.
방울이가 죽었다.
모두들 그 주위에서 가만히 앉아, 푸념의 한숨을 푹푹 내쉰다.
아리는 소리내어 운다.
뭉치는 부들부들 떨면서 눈을 부라리고, 소리없이 눈물을 흘린다.
아마 가만히 있다가는 자신도 저런 비참한 꼴로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분노함에도 아직 어찌할 도리가 없음에 울었을 게다.
그날 저녁, 집 뒤편.
이들은 방울이의 무덤을 만든다.
"정말 싫다. 제 자식도 병들면 갖다 버리나?!"
아리가 외쳤다.
까리는 너무들 했다며 말끝을 흐린다.
그날 밤.
모두가 잠들었으나 뭉치는 공을 굴리고 튀기며 밤을 지새운다.
그러다가 공을 보고 잠시 고민한다.
공을 물고 어디론가 간다.
다음날 아침.
뭉치는 시내 위 나무다리에 섰다.
큰 결심을 한 듯한 뭉치.
시냇물에다가 공을 버린다.
공은 떠서 서쪽으로, 하류로 흘러간다.
뭉치의 곁에 까마귀가 있다.
뭉치는 그걸 보고 놀랐다.
떠가는 공과 까마귀를 번갈아가며 본다.
다소곳이 앉아 까마귀를 쳐다본다.
까마귀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뭉치는 입맛을 다시고는 새를 날린다.
뭉치는 북으로 날아가는 까마귀를 쫓아간다.
깊은 산과 '출입금지'라고 써진 녹슨 철망.
왜 출입금진진 몰라도 말이다.
이 둘이 뭉치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까마귀는 자연스레 퇴장한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뭉치는 유심히 살펴보나 개들은 보이지 않는다.
뭉치는 호기심에 철망의 허술한 부분으로 기어 들어간다.
산길을 따라 걸으며 주위를 살펴본다.
사람 하나 없는, 말 그대로의 자연이다.
들개들[편집 | 원본 편집]
한편, 이 산의 어딘가에선 들개 세 마리가 멧돼지를 쫓고 있다.
뭉치는 그 소리를 듣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본다.
들개들과 멧돼지가 산길의 골을 따라 쫓고 쫓긴다.
뭉치도 산길의 골로 내려온다.
멧돼지는 통나무를 부수며 도망한다.
뭉치는 그걸 보고 놀라 몸이 굳었다.
멧돼지가 뭉치를 덮칠 것이다.
멧돼지를 쫓던 한 검은 들개, 밤이가 멧돼지 곁으로 앞서간다.
멧돼지를 옆으로 밀어 붙이다가 미끄러진다.
멧돼지의 덧니에 어깨를 찔린다.
멧돼지는 밤이를 밀쳐낸다.
밀쳐진 밤이는 뭉치에게 부딪힌다.
멧돼지와 다른 들개들은 옆길로 달려간다.
일어선 밤이는 뭉치에게 팍 인상을 쓴다.
그리고 그르렁거린다.
뭉치는 쫄았다.
밤이는 가버린다.
뭉치는 땅바닥에 뚝뚝 떨어진 피를 본다.
분명 밤이의 것이다.
뭉치는 어디론가 달려간다.
바위산 벼랑 끄트머리다.
한편 맞은편에선 여전히 사냥 중이다.
낙오된 밤이는 뭉치를 째려본다.
요거, 카메라 구도가 둘 사이의 오묘한 (대립?) 관계를 보여준다.
먼저 가는 쪽은 밤이다.
뭉치는 밤이를 보며 퍽 아쉬워한다.
두 번 작게 짖어 본다.
그리고 다시 몇 번 크게 짖어 본다.
이건 아무래도 《101마리 달마시안》의 패러디인가 보다.
한편, 들개들이 살던 곳.
거기엔 한 강아지?(원래 개들이 한 번 애를 낳으면 여럿을 낳으나, 다른 강아지들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강아지들은 다 잡혀갔다고 한다.)가 개미를 희롱하고 있다.
"토리야."
멧돼지 사냥을 갔던 들개들이 돌아왔다.
이들은 토리의 부모와?(소설 상으로는 진돗개들이라고 한다.) 밤이?(사실 저들과는 무연고이다.)다.
토리는 제 엄마에게 먹을 걸 달란다.
물론 엄마는 없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다.
토리는 그 말에 자길 데려갔어야 했다고 말한다.
밤이는 멧돼지에게 입은 상처를 핥는다.
괜찮냐는 토리아빠의 물음에 스친 거라고 한다.
"얼마 만에 찾은 멧돼지인데..."
그러면서 뭉치의 정체를 궁금해 한다.
토리엄마는 산 아래의 개일 것이라고 말한다.
밤이는 사냥도 못 하는 것이 멍청하게 왜 오냐고 혼잣말을 한다.
토리엄마는 산에 사람도 늘어나고 개도 늘어나니 갈 데도 없다고 말한다.
밤이는 산 아래로 내려가면 쉽게 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토리아빠는 인간이 키우는 짐승은 안 된다고 말한다.
밤이에게 산길에 살던 개들이 모조리 잡혀 들어갔다는 걸 알잖느냐고 말한다.
밤이는 자신들이 산에 온 것은 인간들 때문인데 왜 자신들이 쫓겨야 하냐고 묻는다.
토리아빠는 그 얘기는 그만하자고 한다.
전에도 이 문제로 갈등이 있었는 듯싶다.
토리아빠는 토리엄마에게 쥐라도 잡아오자고 한다.
토리엄마는 밤이에게 토리를 맡긴다.
토리가 제 엄마를 따라가려고 하는 것을 밤이가 막는다.
토리는 자기도 쥐 정돈 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토리에게는 맨날 자기만 안 된다는 어른들.
토리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는 밤이에게 산 아래엔 누가 사냐고 묻는다.
밤이는 조금 놀라서 뜸을 들이더니 괴물이 산다고 답한다.
그러나 토리가 원하는 대답은 이게 아니다.
토리는 밤이에게 산 아래에 자신들과 같은 개들이 산다지 않았느냐고 되묻는다.
밤이는 신경 끄라고 말한다.
토리와 밤이는 서로 재밌게 논다.
한편, 아지트에서는 사라진 뭉치를 염려한다.
개코는 뭉치의 공도 사라졌음을 알아차린다.
그때 웬 문소리.
봉지는 다들 숨으라고 말한다.
다들 정해진 데로 숨는다.
노심초사하는 개들.
뭉치가 나타나자 이들은 긴장을 푼다.
짱아는 아침 댓바람부터 어딜 싸돌아다니냐고 묻는다.
뭉치는 어물쩍 넘긴다.
개코는 뭉치의 냄새를 맡는다.
거기서 낯선 냄새를 발견한다.
짱아는 개인행동은 하지 말라고 말하는 참이다.
근데 봉지는 자기 먼저 가겠다며 개인행동을 한다.
짱아는 그 점을 나무라기는커녕 일찍 댕기라고 말한다.
봉지는 반쯤 건성으로 "네" 하고 답한다.
나머지는 샤말란네 가게 뒷문을 간다.
어제처럼 해보려 한다.
그러나 나타난 것은 가게 주인이다.
가게 주인은 개들에게 물을 대야째로 뿌린다.
흠뻑 젖은 개들은 미끄러져 넘어지면서도 토낀다.
가게 주인은 토끼는 이들에게 말란이는 짤렸다고 소리친다.
이들은 소득도 없이 되돌아간다.
샤말란이 돈이나 제대로 받았을는지나 걱정한다.
돌아가는 길에 산 쪽을 바라보다가 시무룩해진 뭉치.
뭉치는 고개를 떨군다.
그런데 웬 재미스러운 것을 보게 된다.
거대한 벌레 하나가 개미 세 마리에게 쫓긴다.
뭉치의 상상 속, 이들은 멧돼지와 들개들이 된다.
뭉치가 마음이 가는 쪽은 밤이다.
그러나 상상 속에서도 밤이는 냉정히 가버린다.
개코가 뭉치에게로 와서 뭐하냐고 묻는다.
뭉치는 괜시리 놀란다.
뭘 그렇게 놀라냐는 개코.
뭉치는 벼룩을 터는 척하며 시치미를 뗀다.
개코는 뭉치에게서 수상한 냄새가 난다고 한다.
아리는 뭉치에게 가자고 한다.
한편, 뭉치도 제 몸의 냄새를 맡아본다.
뭔 내음이었을까? 산 내음? 밤이의 냄새?
글쎄다.
냄새 맡고는 웃으며 산을 바라보게?
들개와의 재회[편집 | 원본 편집]
그날 밤.
뭉치는 서랍장에서 뼈다귀 하나를 꺼낸다.
그리고 티가 안 나게 다른 뼈다귀의 간격을 맞춘다.
다음날 아침.
뭉치는 뼈다귀를 물고 산으로 간다.
뭉치의 뒤에는 철거 작업을 하는 굴착기들이 보인다.
뭉치는 어제처럼 철망을 기어 들어가려 한다.
수풀 사이에 숨은 토리는 그걸 빤히 바라본다.
좀 더 가까이서 보려고 한다.
도토리를 밟고 미끄러진 토리는 뭉치의 앞으로 굴러 떨어진다.
토리는 뭉치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형, 산 아래에 살지?"
그리고 뭉치가 물고 온 뼈다귀 냄새를 맡는다.
"우아. 희한한 냄새가 나네? 이게, 괴물들이 주는 먹이야?"
뭉치는 괴물이 사람이냐고 묻는다.
토리는 '사람'이라는 것에 호기심을 가진다.
"사람? 사람은 어때? 막 무서워? 아님 착해?"
뭉치는 시치미를 뚝 뗀다.
"몰라. 난 이제 사람개 아니야."
토리는 실망한다.
뭉치는 밤처럼 까만 개를 아냐고 묻는다.
토리는 그 말에 밤이 누나 말이냐고 말한다.
뭉치는 그걸 듣고 얼굴을 불쑥 들이민다.
그러다가 철창에 코를 부딪힌다.
뭉치는 토리에게 그게 이름이냐고 묻는다.
의외의 반응에 토리는 뭉치에게 밤이를 어떻게 아냐고 따진다.
뭉치는 그 말에 머뭇거린다.
"토리야! 토리야!"
"어? 엄마다!"
토리엄마가 토리를 부른다.
토리는 도토리를 발로 깐다.
그러면서 이름이 완전 구리다며 궁시렁댄다.
누군가의 개도 같은 생각을 할는지 모르겠다.
토리는 제 엄마에게로 간다.
뭉치에게는 다음에 또 만나자고 한다.
"도토리!"
"아이, 엄만 맨날 나만 갖구...."
"엄마...?"
뭉치는 오랜 추억에 잠긴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철망 아래를 기어 들어간다.
뭉치는 산을 걸어간다.
개 짖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뭉치는 그리로 가본다.
그러다가 이들이 사는 곳을 발견하게 된다.
토리는 제 엄마와 막대기 던지고 주워오는 놀이를 한다.
막대기를 주워오던 토리.
토리는 뭉치를 발견한다.
"형!"
"형?"
적잖이 당황한 표정의 토리엄마.
토리엄마는 토리가 보고 있는 쪽을 바라본다.
뭉치다.
토리엄마와 밤이는 뭉치를 경계한다.
그리로 내려가려던 뭉치.
미끄러져 구른다.
토리는 뭉치를 재미스럽게 바라본다.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가는 토리.
토리는 다 큰 형이 촌스럽게 왜 그러냐고 묻는다.
"누구한테 형이래!"
토리엄마는 토리가 뭉치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데려온다.
"산 아래로 내려가지 말랬지, 도토리!"
토리는 그래도 철망 밖으로는 안 나갔다고 말한다.
뭉치는 일어서서 몸을 턴다.
밤이와 토리엄마는 여전히 뭉치를 경계한다.
"넌 누구냐!"
그때, 토리아빠가 잽싸게 나타났다.
쥐를 잡고 온 참이다.
참고로, 영화에서는 뭉치와 밤이는 토리아빠에게 하십시오체와 해요체를 쓰고 토리아빠는 이들에게 해라체와 해체를 쓰는데, 소설에서는 서로 해라체와 해체를 쓴다.
"누구냐고 물었다!"
"전, 마을에서 온, 뭉치라고 합니다."
"여긴 왜 온 거지?!"
"그냥... 산에서 마음껏 달려 보고 싶어서요."
"멍청이."
밤이가 끼어 들었다.
"쓸데없이 달리기는 왜 달려?"
"달리는 건 놀이가 아냐.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달리는 거야."
토리아빠는 떠돌이 개들은 올라오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왜 그러냐고 뭉치가 묻는다.
토리아빠는 산에 올라온다는 것은 인간과 영원히 적이 됨을 의미한다고 답한다.
뭉치는 자기도 이미 마을에서 쫓기는 몸이라며 이미 인간과는 적이 되었다고 한다.
토리아빠는 살아있는 것을 사냥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밤이는 뭉치에게 산짐승은커녕 쥐도 못 잡을 거라고 말한다.
이들은 뭉치에게 산에 올라오지 말라고 한다.
특히 밤이는 뭉치를 떠돌이라고 부른다.
"우린 떠돌이가 아냐!"
그러나 밤이는 뭉치가 물고 온 뼈다귀를 차버린다.
마음이 상한 뭉치.
뭉치는 쥐를 잡아오면 되겠냐고 말한다.
밤이는 뭉치를 비웃는다.
그걸로 누구 배를 채우느냔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멧돼지 정돈 돼야지' 한다.
밤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들어간다.
(소설에서 뭉치는 수치심 때문에 온몸을 떨며 뛰쳐 나간다. 그리고 속으로 이들에게 무례하다며 괜히 갔다고 후회한다.)
불화[편집 | 원본 편집]
그날 밤.
봉지를 문 봉지는 사냥꾼에게 쫓긴다.
한편, 풀이 죽은 뭉치는 산을 내려간다.
웬 염소 울음소리가 들린다.
뭉치는 소리나는 쪽으로 간다.
바위 뒤에 숨어서 살펴본다.
자신감에 찬 뭉치의 표정.
그 아래엔 흑염소 농장이 있다.
한편, 도망치던 봉지는 봉지를 버리고 달아난다.
사냥꾼은 오토바이로 계속 봉지를 쫓는다.
그리고 무전으로 간다고 외친다.
봉지가 가려던 길이 철망으로 막힌다.
사냥꾼들이 봉지를 거기로 유인한 것이다.
진퇴양난의 봉지는 격하게 짖는다.
그러나 곤봉을 든 이는 결국 봉지에게로 서서히 다가간다.
카메라 줌아웃.
점 같으면서도, 후려치는 사냥꾼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봉지의 낑낑대는 외마디 비명.
(소설에서는, 봉지는 좀 더 뒤에서도 등장한다. 그리고, 뭉치에게 자유의지를 일깨워준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게 마지막 등장이다.)
화면전환.
뭉치가 아지트로 돌아가보니 아리는 울고 있고 까리는 세상 한탄을 한다.
무슨 일이냐고 뭉치가 묻는다.
"오늘 봉지가 잡혀갔어."
개코는 봉지가 늘 앉아 있던 2층 계단 위를 바라본다.
뭉치도 거기를 향해 본다.
봉지가 없다.
짱아는 등지고 누워서 뭉치에게 잡혀가게 계속 싸돌아다닐 거냐고 호통을 친다.
어디로 잡혀갔냐는 뭉치가 묻는다.
"어디긴 어디여, 보호소로 가는 거제."
"보호하긴 뭘 보호해?"
까리가 말했다.
"거기 끌려가면 우린 그냥 죽은 목숨이라고."
아리는 섧게 운다.
"죽는다구요?!"
뭉치는 놀랐다.
개코는 이번에도 '그곳'으로 가자고 한다.
짱아는 개코에게 늑대도 아닌데 뭘 먹고 사냐며 따진다.
개코는 '무서운 냄새' 이야기를 한다.
개코는 폭발사고에 휘말려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까리는 그러면 어떻게 찾아가냐고 말한다.
그 말에 개코는 한 번 맡은 냄새는 다 코 안에 있단다.
한편, 뭉치는 달력 그림에 석쇠를 대어 본다.
그러더니 저희들도 산에서 살면 안 되냐고 묻는다.
갸우뚱해 하는 짱아와 개코.
이들에게 뭉치는 산도 좋더라고 말한다.
짱아는 뭉치에게 벌써 산에 갔다 왔다며 못마땅해 한다.
왜 그러냐는 뭉치가 묻는다.
짱아는 거기 들개들은 그냥 개들이 아니라 산의 무법자들이니?(북한산 들개와 유기견들의 별명이 '북한산 무법자'다. 2010년대 초반에, 언론과 환경부에서도 그렇게 불렸다.) 신소리 그만하고 구겨져 있으라고 한다.
불만족스러운 뭉치의 표정.
"여기야말로 답답하고 지겨워요."
"뭐여, 답답해? 그렇게 답답하고 지겨워서! 뭔 사단이 났는지도 모르고 싸돌아다녔냐?!"
"싸돌아다녀요?!"
뭉치와 짱아 사이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아리는 울면서 그만하라고 외친다.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싸가지 없는 자석...!"
짱아는 여전히 등진 채로 있다.
뭉치는 뒤돌아서다가 봉지가 가져오려 했던 봉지를 본다.
울컥하여 분노가 치밀어오른 뭉치.
"왜 우린 사람한테 버려졌는데, 사람들이 먹다 버린 쓰레기나 얻어 먹어야 되죠? 왜 사람들 쓰레기 더미 속에서 숨어 살아야 하냐고요?"
짱아는 뭉치를 똑바로 본다.
"니 참 말을 이쁘게 헌다잉. 버르장머리 없는 자석, 배 따수운 줄 몰르구. 쯧쯧."
강한 의지를 가진 듯한 뭉치.
"이렇게 사느니, 산에 가서 사는 게 나아요!"
뭉치는 역설한다.
"그래, 그래! 그렇게 짐승되고 싶으면, 산이고 들이고 니 맘대로 살아! 가서 살아!"
뭉치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알겠어요! 다 관둬요!"
뭉치는 집밖을 나가려고 한다.
개코가 뭉치를 타일러 본다.
"뭉치야! 뭉치야, 이러면 안 돼!"
"왜요? 제 생각이 뭐 잘못 됐어요?"
뭉치는 의지를 꺾지 않고 그렇게 아지트를 나간다.
짱아는 나가는 뭉치 들으라고 이렇게 말한다.
"던져진 대로 살면 되는 거고!"
흥분한 탓에 달수 인형을 던진 짱아.
달수를 다시 주워 쓰다듬으며 계속한다.
"사는 대로 생각하면 되는 거여! 지가 뭐라구 생각한 대로 살겠다구 난리여, 난리가."
참 둘 다 자기 주장이 강해, 안 그래?
살어리 살어리랏다
쳥산애 살어리랏다
청산별곡의 화자처럼 뭉치는 산에서도 안정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
그런대서 새더러,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울 테니 너도 울라고 한다든가,
'갈던 사래'를 그리지는 않는다.
독주를 빚어 마시기는 더욱이 아니한다.
현실에 체념적인, 현실주의적인 청산별곡의 화자와,
이상주의적인 뭉치의 분명한 대조를 보라.
흑염소 농장 ― 양몰이 개의 피 ―[편집 | 원본 편집]
뭉치는 그 길로 흑염소 농장을 간다.
모든 염소들이 자고 있다.
뭉치는 좋은 기회다 싶은 표정이다.
뭉치는 철사 울타리를 뛰어넘으려 한다.
도움닫기를 하려고 조금 뒷걸음질 친다.
그리고 뭉치는 달려서 울타리를 넘는다.
조금 뒤, 웬 소란스러운 소리.
농장 주인이 깨어 밖을 나선다.
뭉치는 보더 콜리답게 염소를 양처럼 몬다.
염소들은 널빤지로 기대어 둔 문을 넘어뜨린다.
이들은 밖으로 탈출한다.
농장 주인은 염소 한 마리 남김없이 털린다.
뭉치는 흑염소 중 세 마리만 산으로 몰아간다.
농장 주인은 어쩔 줄 몰라한다.
"하이구, 들개 저 녀석들...!"
단지 가만히 서서 돌아오라고만 외친다.
그 다음날 아침, 북한산.
뭉치는 여전히 염소를 몰고 있다.
몰던 염소 중 하나가 지쳐 멈춘다.
뭉치는 그 염소에게 되돌아간다.
그리고 달리라고 짖어댄다.
그렇게 뭉치는 염소를 토리네로 몰고 온다.
염소와 방울 소리에 잠에서 깬 토리네.
이들은 귀에 인식표가 붙은 염소 세 마리와 뭉치를 본다.
토리아빠는 뭉치에게 뭐하는 놈이냐고 묻는다.
뭉치는 아직 물지는 못하겠다고 해맑게 답한다.
물론 토리아빠는 이런 답을 원한 게 아니지만.
"넌 지금 사냥감을 몰고온 게 아니라, 재앙을 몰고온 거야!"
"네?"
"사람들이 몰려올 거란 말이다. 당장 데리고 내려 가!"
뭉치는 머뭇거린다.
팍 인상을 쓰며 그르렁거리는 밤이.
뭉치는 밤이를 보고 쫄아 버린다.
결국 뭉치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염소들을 다시 몰아간다.
토리아빠는 어서 떠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토리가 없다.
염소를 따라간 것이다.
밤이가 토리를 데려오겠다고 나선다.
한편, 염소농장에서는 공단에?(公團, 아마 국립공원공단일 게다. 거기서 들개 포획 업무도 맡으니.) 전화를 건다.
농장주인은 들개들도 잡아서 탕을 끓여야 한다고 역정을 낸다.
사냥꾼은 비의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부르며 선글라스를 쓴다.
그리고, 개를 잡으러 찦차를 타고 나선다.
산 아래 입산금지구역 앞.
공단직원들과, 사냥꾼 무리가 사냥개 세 마리와 함께 모여 있다.
사냥꾼들은 총에 실탄을 채운다.
그리고 발자국으로 크기를 가늠해 본다.
꽤 큰 놈이랜다, 뭐 당연한 말이지만.
한 공단직원은 그걸 본다.
그리고 이들에게 실탄은 안 되고 마취총만 된다고?(실제로는 포획망을 쓴댄다. 마취총에 맞아도 도망간대나.) 말한다.
그 말에 사냥꾼은 들개 본 적 있냐고 묻는다.
공단직원은 머뭇거리며 본 적은 없다고 답한다.
사냥꾼은 들개를 마취총으론 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도 공단직원은 사살은 불법임을 내세운다.
사냥꾼들도 건성으로 알겠다고 말한다.
어쨌든 그렇게 이들도 마취총을 쓰게 된다.
뭉치는 풀이 죽은 채로 염소를 몰고간다.
뒤에서 토리가 염소를 따라 뛰어온다.
토리는 염소 다리를 물려 한다.
그러나 염소가 뒷발길질을 한다.
"너 여기 오면 안 돼!"
"나두 사냥에 같이 나가두 되는데, 엄만 괜히 그래."
그러면서 자기도 할 수 있다면서 염소 다리를 건드려 본다.
그때, 밤이가 나타났다.
염소는 자연스럽게 퇴장한다.
염소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만 이 이후론 아무도 염소 걱정을 안 한다.
밤이는 토리에게 빨리 떠나야 한다며 돌아가자고 한다.
"여길 떠난다고?"
뭉치가 놀라서 말했다.
밤이는 뭉치가 저지른 일 때문에 보금자리를 옮겨야 한다고 말한다.
뭉치는 단지 이들과 함께 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떠돌이 개, 이건 사냥이 아니라 인간들 걸 훔쳐온 거라고!"
뭉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
이에 뭉치는 눈동자가 흔들린다.
밤이는 뭉치에게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말한다.
밤이는 토리와 함께 돌아간다.
뭉치는 자신의 한 일 때문에 충격을 먹었다.
굳어 버린 뭉치의 몸.
뭉치는 어디선가 총을 장전하는 소리를 듣는다.
사냥꾼이 밤이를 조준하고 있다.
사냥꾼은 조준경으로 밤이를 보자 바로 알아본다.
"어라! 저거 우리 블랙이 아냐?!"
사냥꾼은 방아쇠를 당긴다.
뭉치는 몸을 날려 밤이를 덮친다.
마취총은 토리에게 맞는다.
밤이는 토리에게 꽂힌 마취총을 빼낸다.
사냥꾼은 급히 다음 마취총을 장전한다.
밤이는 총탄이 날아온 쪽을 본다.
밤이도 사냥꾼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트라우마가 되살아난다.
밤이는 울먹거리며 몸이 굳어 버린다.
두번째로 날아온 총알은 뭉치가 몸으로 막았다.
뭉치의 왼쪽 뒷다리에 맞았다.
뒤이어 사냥개들이 몰려온다.
몸이 후들거리는 뭉치.
그 상태로 사냥개 세 마리와 대치한다.
세번째 총알은 밤이 곁의 나무에 맞는다.
그제서야 밤이는 도망치기 시작한다.
뭉치는 밤이가 도망치는 것을 확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하게 비틀거린다.
뭉치는 쓰러졌다.
사냥개들은 뭉치를 제끼고 밤이를 추격한다.
밤이는 가파른 바위 언덕을 잽싸게 오른다.
사냥개들은 바위를 오르지 못하고 떨어져 버린다.
추격에 실패한 사냥꾼은 뭉치에게로 다가간다.
토리는 이미 케이지 안에 들어갔다.
뭉치에게 뭔가를 주사하는 공단직원.
사냥꾼은 공단직원에게 뭘 박는 거냐고 묻는다.
바로 GPS 위치 추적 장치다.
서식 반경을 파악한다고 한다.
"그래서?"
"발본색원, 일망타진이죠!"
뭉치를 이용해 그 무리를 한꺼번에 싹쓸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산에 풀어 놓음 된다고 말한다.
"싹쓸이...!"
사냥꾼은 낄낄거리며 웃는다.
뭉치는 마취에 완전히 쩔었다.
개 공장에서의 탈출[편집 | 원본 편집]
뭉치의 꿈 속.
갓 태어난 뭉치.
어둠 속에서 뭉치에게 사람의 손이 나타난다.
그리고 뭉치를 어미에게서 떼어놓는다.
뭉치는 케이지 안에 다른 형제들과 들어가게 된다.
뭉치는 차에 실려간다.
그러면서 엄마를 부르짖는다.
뭉치의 엄마도 울부짖는다.
뭉치는 애견숍으로 팔려 간다.
뭉치는 밖으로 나가려고 유리벽을 긁고 있었다.
옛 반려자 부부가 귀엽다며 뭉치를 데려간다.
막 커지는 애가 아니냐는 아내가 묻는다.
남편은 귀여운데 뭐 어떠냐고 한다.
이들은 뭉치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뭉치의 이름을 쓴 테니스공으로 놀아주었다.
꽤 빠르게 성장한 뭉치.
목에는 짖음 방지기가 달려 있다.
하루는 반려자 아저씨가 뭉치를 차에 태웠다.
차 안의 뭉치는 차 밖에서 또다른 자신을 본다.
차 밖의 뭉치는 차 안의 뭉치를 쫓아가며 짖는다.
그러나 달려가다가 크게 넘어진다.
마치 영화 첫 부분의 자신처럼.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두 번씩이나 평가하다니, 더 끔찍한 일이다.
이상이 괜히 거울을 보고 두려워 한 게 아니다.
그나저나 이 장면은 꿈으로 처리하지 말고 맨 앞으로 옮겼으면 하는데.
하여튼, 뭉치는 거기서 깨어났다.
비몽사몽하여 철창을 박는다.
정신 차린 뭉치는 철창 밖을 바라본다.
굉장히 열악하고 더러우며 좁다.
그런 곳 개들이 여러 마리 있다.
여기가 '개 보호소'랍시고 운영되는 곳이다.
뭉치는 꽤나 충격을 받았는 듯싶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앙상한 개들, 먼지와 거미줄이 쳐진 철창살, 여러 대의 주사기와 약품들.
뭉치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가만 생각하면 이탈리아 영화 《몬도가네》?(Mondo Cane; 1960년대 이탈리아 영화로, 개의 세상이라는 뜻이다. 이 영화에서는 구미권부터 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까지 원시 문명과 현대 문명을 불문하고 적어도 하나씩은 있는 엽기 문화를 소개하며 인간 전체를 비판한다.)와 《속 몬도가네》?(《몬도가네》의 후속편으로, 원제는 Mondo Cane 2이다.)에서도 개가 끌려가면서 이런 철창 안으로 던져지는 장면이나 좁은 철창에 개들이 갇혀 있는 장면이 제일 먼저 나오지?
뭉치는 맞은편에서 토리를 발견한다.
토리도 뭉치를 발견한다.
그리고 무섭다면서 어디냐고 묻는다.
한편, 밤이와 토리의 어버이는 냄새를 쫓아 가고 있었다.
이들은 토리가 짖는 걸 듣는다.
이들은 밤이가 달려가는 데로 달려간다.
(소설에서는 산 주위에 개 공장은 하나 뿐이고, 거기 공장장이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며 자신이 탈출했던 개 공장을 토리의 부모에게 알려준다.)
사냥꾼은 누군가와 전화를 한다.
블랙이를 봤다고 한다.
말하기를 씨받이로 쓰려던 게 밖으로 내뺐댄다.
블랙러시안 종이라?(가상의 견종이다.) 몸값이 꽤나 나간댄다.
500이면 터무니없는 값, 값이 한 장 정도는 된다고 한다.
사냥꾼은 찦차를 타고 어디론가 나선다.
밤이와 토리의 어비이는 산언저리에서 이를 본다.
이들은 '개 보호소'를 덮치러 간다.
뭉치는 단단한 철창살을 물고 뜯고 별짓을 다 해 본다.
그때 격하게 사냥개들이 짖는다.
또, 이를 들은 토리와 뭉치.
토리아빠가 덜 닫힌 개 공장의 철문을 열어제낀다.
그리고 밤이와 토리엄마와 함께 나타난다.
토리아빠가 묶인 사냥개들을 상대한다.
그동안 밤이와 토리엄마는 토리를 찾으러 간다.
사냥꾼은 동료에게서 경찰 떴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혹 단속에 걸릴까 하여 급히 차를 돌린다.
이 장면에서 나타나는 표지판에 따르면, 경기도 양주시 일영로 556~560 사이에서 하행으로 유턴을 했다.?(구글 스트리트 뷰 도움 좀 받았다. 다만, 묘사된 것과는 달리 신호등과 비보호 좌회전 표지판도 있고 주위에 철물점이니 음식점이니 낚시용품점 등 전혀 인적이 드문 데는 아니다. 2018년의 스트리트 뷰이다만, 설마 제작하는 새 새로 설치한 건가? 2015년에도 진배없던데? 2012년에 착수해서 시나리오 작업이 2년 걸리고 나머지 4년간은 취재하고 그림 작업을 했을 테니 2015년 이전에 취재를 한 건가?)
밤이와 토리엄마가 토리를 찾고 있다.
토리가 엄마를 부르짖는다.
밤이와 토리엄마는 토리가 갇혀 있는 철창으로 간다.
토리엄마는 걸쇠를 빼낸다.
그리고 토리를 구해낸다.
토리는 밖으로 나오자 마자 뭉치를 걱정한다.
토리엄마는 밤이에게 말없이 끄덕인다.
밤이는 같이 가자며 뭉치를 구해준다.
한편, 돌아오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들려 온다.
이들은 다급해진다.
뭉치가 밖을 나온다.
그러자 갇혀 있는 다른 모든 개들이 눈에 든다.
저들은 모두 밖을 나온 개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들은 저들을 모두 풀어주기로 한다.
걸쇠를 모두 빼내었다.
그러나 이들은 나가야 하나 하며 기웃거린다.
밤이가 어서 나오래도 그런다.
답다워라.
뭉치가 나오래서야 밖으로 내달려 탈출한다.
막 도착한 사냥꾼은 탈출하는 개들을 본다.
차에서 급히 내려 이리 오라고 소리친다.
그때, 사냥꾼은 밤이를 본다.
아빠 찾으러 왔냐고 한다.
그리고 삽자루를 잡고 내리치려고 한다.
밤이는 피한다.
다시 한 번 내리치려고 하자 밤이가 피한다.
토리아빠가 뛰어들어 사냥꾼을 벽으로 밀쳐 버린다.
그 충격으로 지붕 위에 있던 벽돌들이 무너진다.
벽돌들은 사냥꾼의 다리를 깔아버린다.
공격하려고 다가가는 밤이.
토리아빠가 막는다.
그냥 냅두지 왜?
어쨌든 이들도 마저 달아난다.
사냥꾼은 싹 비어진 철창을 보게 된다.
다음날 아침, 산중의 시냇가.
들개들은 에서 물을 마시며 목을 축인다.
토리아빠는 뒤를 돌아본다.
조금 멀리서 뭉치가 가만히 서 있다.
토리아빠는 뭉치에게 이름을 다시 묻는다.
뭉치는 다가가서 답한다.
"뭉치, 우리가 자유롭게 살려면, 스스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뭉치는 이를 귀담아 듣는다.
"우리 이빨로, 쇠를 자를 수는 없지만,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지."
밤이가 뭉치의 곁을 지나간다.
무심한 듯 시크하게, "너도 목 좀 축여라"라고 말한다.
개들의 여정 1[편집 | 원본 편집]
개들, 의기투합하다[편집 | 원본 편집]
뭉치도 물을 마신다.
토리엄마의 걱정.
"사람 없는 곳을 또 찾을 수 있을까?"
토리아빠도 탄식만 한다.
"그러게. 어딜 가나 사람들 세상이야."
밤이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떨군다.
그것을 가만 듣고 있던 뭉치.
뭔가 생각나 뒤돌아서 말한다.
"어? 있어요! 아, 아니. 제가 아니라요. 우리 개코 아저씨가요."
한편 아지트 안.
개코는 욕조에서 자고 있다.
굴착기가 아지트를 허물기 시작한다.
이들은 놀라서 깬다.
이들은 급히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달수 인형을 빼먹은 짱아.
짱아는 되돌아가려고 한다.
개코가 짱아를 물어 밖으로 데려간다.
"달수야―!"
산언저리로 피한 개들.
이들은 허물어지는 집을 그저 바라본다.
개코는 짱아에게 묻는다.
"그 놈의 수달 인형은, 왜 그리 끼고 사는 거요?"
짱아의 침울한 목소리.
"우리 주인 아저씨가, 선물로 준 거여. 《마당을 나온 암탉》 못 봤수?"
뭐 앞서 말했듯이 같은 제작사 작품이다.
그 말에 다들 침울해진다.
"아저씨―!"
웬 뭉치의 목소리.
이들이 있는 데보다 좀 높은 곳.
거기서 뭉치가 개코를 계속 부르고 있다.
아리는 뭉치를 보자 반갑다는 듯이 외친다.
뭉치는 이들에게로 다가간다.
짱아는 뭉치에게 냉소적으로 말한다.
"기세좋게 나가더만 사흘도 안 돼서 돌아와 부렀네. 집 나가보니 개고생이제?"
뭉치도 헐리는 집을 본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뭉치.
짱아는 어디서 사냐고만 읊조린다.
그런 그들의 눈에 들개들이 보인다.
이들은 들개들을 경계하며 짖어댄다.
뭉치는 촌스럽게 뭐하는 거냐며 그만하라고 한다.
쟤들은 뭐냐고 짱아가 묻는다.
뭉치는 저들도 갈 데가 없다고 말한다.
토리아빠가 천천히 내려온다.
그리고 개코에게 우두머리가 당신이냐고 묻는다.
한편 개코 다리 사이에 숨은 짱아.
개코는 짱아를 보며 이쪽이라고 한다.
개코는 우두머리끼리만 모아놓는다.
다른 이들은 아직 따로 대기탄다.
그리고 토리아빠에게 '낙원'의 모습을 설명한다.
토리아빠는 긍정적으로 듣는다.
그러나 소형견인 짱아를 보고 걱정한다.
"작은 개들은 거기서..."
이에 짱아가 끼어든다.
"알았다고! ...요."
헛기침.
"에... 시방부터 우린, 같이 허되 따로 사는 삶, 따로 살되 같이 허는 삶. '낙원'을 찾을 때꺼정, 그때까지만 협력허는 거라구... 요. 알았어? ...요?"
"좋아요. 우리, 그곳으로, 가 봅시다."
둘은 주먹 인사를 한다.
개코가 대기 중인 이들에게 앞발을 흔든다.
그리고 이들은 '낙원'까지 동행한다.
집개들의 테제?(These, 定, 정)와 들개들의 안티테제?(Antithese, 反, 반), 그리고 이들이 공동으로 내놓고 추구하고자 하는 진테제?(Synthese, 合, 합).
마치 변증법(Dialektik) 같지 않나?
토리는 아리와 까리를 귀엽게 본다.
이들을 쌍둥이 형아라고 부르고 장난을 친다.
아리와 까리는 토리를 쫓아다닌다.
아리는 토리에게 몇 살이냐고 밝게 묻는다.
까리는 까칠하게 일로 오라고 외쳐 댄다.
뭉치의 곁으로 밤이가 지나간다.
밤이는 뭉치에게 미소를 보인다.
"예쓰!"
토리는 아리와 까리 주위를 폴짝폴짝 뛰며 뱅뱅 돈다.
마치 운동을 부정하는 사람 앞에 선 디오게네스처럼.
그리고 계속 쌍둥이냐고 묻는다.
행군[편집 | 원본 편집]
논 사이로 난 큰길을 걷는다.
짱아는 뭉치에게 뭘 알고 나서냐고 한다.
"이제 고생길이 훤하다."
토리엄마는 그런 곳이 있다니 다행이라고 한다.
"우리 토리두... 마음껏 키울 수 있구..."
토리는 잠자리를 잡으려고 껑충댄다.
밤이가 토리에게 말없이 가자고 한다.
가는 길에 소낙비가 내린다.
이들은 급히 뛴다.
'노곡리정미소'?(이 여정이 북한산에서 시작되는 게 맞고, 이들의 이야기가 서울경기강원 북부에서 일어나는 게 맞다면, 노곡리는 연천군이나 포천시에 있는 마을일 것이다.(한국어 위키백과의 노곡리 문서에 따르면 말이다.) 그러나 조금 이후에 등장할 장면 때문에 제작진들이 제작 중에 착오가 있었나 싶은 데가 있다.) 입구의 지붕 아래.
이들은 거기서 비를 피한다.
비는 장맛비처럼 쏟아나린다.
토리는 아리와 까리 사이로 자리를 옮긴다.
뭉치가 그 탓에 밀려난다.
토리엄마는 이리 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토리는 '이 형아들'이 마음에 든다고 한다.
까리는 토리에게 부부라고 계속 말한다.
토리가 부부는 쌍둥이냐고 묻는다.
아리는 웃으며 닮긴 하다고 말한다.
까리도 떫게 그렇다고 말한다.
뭉치는 밤이를 바라본다.
밤이 옆으로 자리를 옮긴다.
짱아는 커플들이 싫다고 궁시렁댄다.
뭉치는 파이프로 쏟아진 빗물에 맞았다.
물기를 털고 밤이 곁에 꼭 붙는다.
개코는 비오는 풍경을 보며 좋다고 말한다.
그날 밤, 여전히 비가 쏟아진다.
이들은 정미소 안에서 잠을 잔다.
잠꼬대를 하는 짱아.
달수를 찾는다.
짱아의 발길질에 깨어난 뭉치.
뭉치는 밤이를 바라본다.
짱아가 또 뭉치를 찬다.
뭉치는 짱아를 다시 눕히고 잠에 든다.
자유로 사고[편집 | 원본 편집]
절망을 넘다[편집 | 원본 편집]
가을빛이 약간 든 어느 날.
개코가 뭔가를 발견한다.
철망이 쳐 있는데, 자동차가 다닌다?
개코는 저기라고 말한다.
짱아는 더이상 못 가겠다고 한다.
고라니가 뛰어다닌다.
토리는 고라니를 보고 입맛을 다신다.
이들은 이 자연의 장소(?)로 내려간다.
파주시 문산읍 내포리.?(이래서 내가 제작진의 착오가 있었나 싶은 것이다, 파주시는 연천군과 포천시 남쪽에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정확히 여기.
영화 속에선 양쪽 다 갈밭이던데.
왕복 8차선에서 고속으로 달리는 자동차.
수없이 달린다.
짱아가 말했다.
"워메, 이게 웬 황천강이라냐? 설매 여길 건너자는 것은 아니겠지?"
개코가 이상해 한다.
"이, 이상하다? 이런 길은 없었던 것 같은데?"
개코의 말이 맞다.
여기는 자유로다.
길 한편엔 대형 광고판이 섰다.
'행복한여행'이라고 써 있다.
참 반어적이다.
근데 저거 진짜 광고다. 흠.
짱아는 돌아가자고 말한다.
토리아빠가 말한다.
"우리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잖나?"
갓길에서 몇 발짝 앞으로 다가간다.
다른 개들이 염려스럽게 바라본다.
그러더니 무작정 4차선에 뛰어든다.
그러고는 자동차를 노려보며 떡 버틴다.
깜짝 놀란 개들.
운전자는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차는 바로 앞에서 멈춘다.
토리아빠는 어서 오라고 한다.
뭉치가 나서다가 버스에 치일 뻔한다.
다시 3차선으로 뛰쳐나가 본다.
두번째 차도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차는 뭉치의 코끝을 건드리고 멈춘다.
운전자는 뭉치에게 미쳤냐고 소리친다.
이번엔 밤이가 2차선에 나서본다.
원판에는 아무 말 없이 나서는데, 영어 더빙에서는 'Too close'(너무 가까웠어)라고 말한다.
세번째도 가까스로 멈춰섰다.
그 뒤의 트럭이 방어운전을 한다.
상행이 모두 막혔다.
이들은 이때를 기회로 삼아 절반을 건넌다.
토리가 대형트럭이 달려오는 하행 1차선 앞에 섰다.
그걸 본 토리엄마.
놀라서 토리를 몸으로 막는다.
트럭은 이들을 피하려다가 미끄러지면서 사고가 난다.
토리아빠는 놀라서 이들에게 달려가 본다.
토리는 무사하다.
그러나 토리엄마가 부상이 심한 듯하다.?(이 부분의 프레임을 자세히 살펴보면 트럭의 바닥이 높아서 직접적으로 부딪히지는 않고 토리엄마의 꼬리가 뒷바퀴에 밟혔던 것처럼 보이는데 오른편 다리를 절뚝이고 갈비뼈가 부러져서 허파를 다친 것처럼 보인다.)
토리아빠는 토리엄마를 일으켜 세운다.
다른 개들에게는 토리 데리고 어서 가라고 한다.
뭉치는 토리와 밤이를 데리고 간다.
사고 현장 주위.
시민들이 스마트폰으로 이 개들을 촬영한다.
이들은 이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만, 묵묵히 길을 건넌다.
갓길로는 렉카가?(렉카 이름이 '오돌렉카'다. 이 역시 제작사 이름에서 따왔나부다.) 달려온다.
운전자는 다른 렉카도 보내라고 전화 중이다.
토리아빠는 토리엄마를 부축하며 건너고 있다.
토리의 어버이와 렉카 운전자.
이들은 서로를 미쳐 보지 못하고 부딪힌다.
토리아빠는 약간의 의식이 남아 있다.
토리엄마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 일어나...!"
토리아빠도 천천히 눈을 감고 죽었다.
그날 밤.
밤이는 철망 곁에서 죽은 개들을 추모한다.
다른 개들은 그걸 멀찍이서 지켜본다.
뭉치도 밤이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잠을 자던 중.
토리가 잠꼬대를 한다.
웃는 표정으로 엄마아빠를 부른다.
잘하지 않냐고 묻는다.
서글퍼진 다른 개들.
자유로에는 사고의 흔적만 남아있다.
차들은 빠르게 달린다.?(도로의 소실점과 차들의 소실점이 다른지 다들 깜빡이도 안 켜고 차선 변경을 한다.)
새로운 해는 뜨고[편집 | 원본 편집]
다음날 아침.
토리는 어젯일로 풀이 죽었다.
토리의 앞발 곁을 개미가 지나간다.
토리는 개미를 잡는다.
"이 바보야. 넘어가지 말랬잖아, 괴물 있다고."
개미는 토리의 발에서 벗어난다.
"넌 바보! 똥꾸! 멍충이야!"
밤이가 뒤에서 다가온다.
그런 말하지 말라고 한다.
또 토리가 그러면 엄마아빠가 슬퍼할 거라고 말한다.
토리는 눈물이 고인 채로 뒤돌아본다.
"누나―!"
눈물을 쏟는다.
밤이에게 달려가 안긴다.
엄마 냄새가 맡고 싶다고 외쳐 부르며 우짖는다.
한편, 자유로 인근을 둘러보던 개코.
뭔가 이상해 한다.
짱아는 배고픔에 홀로 돌아다닌다.
짱아는 부들을 보고 핫도그로 오해한다.
개 풀 뜯어먹는 소리가 '펑' 하고 난다.
꽃가루가 날린다.
한참 배곯은 짱아.
"개가 인간없이 어떻게 산다고..."
이제 곧 죽을 거라며 드러눕는다.
우연히 웬 사료같이 생긴 것을 발견한다.
짱아는, 모여서 뭔가 말하고 있는 무리를 부른다.
이들은 짱아의 부름을 단순히 개소리로 취급한다.
짱아는 난 분명히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흥분하는 꼬리를 진정시킨다.
짱아는 그것을 혼자 먹어치운다.
자신이 먹고 있는 게 과하게 구수하다고 느낀다.
수풀 사이에서 똥을 싸는 고라니를 본다.
똥은 마치 사료같이 생겼다.
한편, 밤이는 다른 개들을 모아놓고 지도를 그렸다.
그리고 사냥의 전략을 가르친다.
고라니는 탁 트인 데를 좋아한다며 예상 경로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어디를 막아야 할 지를 알려준다.
아리와 까리가 거기를 막기로 한다.
그리고 다른 곳도 막아야 하는데 거기는 누가 막을까 한다.
모두가 토라져 있는 토리를 바라본다.
밤이는 엄청 중요한 자리라고 덧붙인다.
까리는 작은 개가 필요하다며 은근히 부추긴다.
토리는 천천히 다가왔다.
하이네켄 병뚜껑을 지도상 그 위치에 둔다.
"여긴 내가 막을게요."
괜찮아진 듯한 토리의 행동.
거기에 다른 개들이 안심한다.
뒤늦게 온 짱아.
뭐하냐고 묻는다.
배불리 먹은 짱아는 트림을 한다.
아리는 뭘 먹은 거냐고 말한다.
까리는 짱아의 입가에 붙은 걸 본다.
사료냐며 다가가 만져보려고 한다.
사료가 아닌 것을 알고 물러선다.
토리가 다가간다.
고라니 똥이라고 말한다.?(시추의 식분증이 유별나게 자주 발견됨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의도된 설정으로 보인다.)
그 말에 다들 놀란다.
까리는 '똥 먹으면 똥개 된다는데'라며 가장 크게 놀란다.
짱아는 그 사실에 울어 버린다.
이 부분 연기는 꽤 어색했다.
개코는 외딴 곳에서 짱아를 위로한다.
그리고는 개코가 똥 맛은 어땠냐고 묻는다.
짱아는 울면서 맛있었다고 답한다.
이들은 고라니 사냥을 준비한다.
한편, 여기서부터 이 영화의 장점이던 높은 사실성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그 자리에 오락성이 더해지기 시작한다.
아리와 까리는 새끼줄을 단단히 묶는다.
이상 무.
나무 위에는 개코.
이상 무.
갈밭에서 고라니를 지켜보는 밤이.
3마리다.
뛰쳐나와서 고라니 하나를 몰아간다.
아리와 까리가 새끼줄을 당긴다.
고라니가 힘이 세서 실패한다.
토리와 짱아가 고라니를 몰아넣는다.
뭉치는 밤이의 신호에 따라 밤이와 교대한다.
뭉치는 고라니를 나무 쪽으로 몰아넣어야 한다.
고라니의 곁에 서길 시도한다.
두 번의 시도 끝에 성공.
개코가 넝쿨을 잡고 타잔처럼 날아 들어온다.
뒷발로 고라니의 턱을 날린다.
밤이가 튀어나와 고라니의 목을 물어 죽인다.
사냥에 성공.
모두들 좋아한다.
그러나 고라니를 먹는 것은 밤이와 토리 뿐이다.
입가에 피를 잔뜩 묻힌 토리.
대박 맛있다면서 빨리 오라고 한다.
다른 개들은 멀찍이 떨어져 서 있다.
이 장면을 몬도가네 같다는 듯이?(엽기적이거나 혐오스러운 음식 먹는 것을 바라보는 것같이) 바라본다.
개코가 입맛을 다시나, 그 뿐이다.
그나저나, 고라니는 냄새가 역하다고 알려져 있던데?
조금 고민하던 뭉치.
고라니가 있는 쪽으로 내려온다.
등을 물어 뜯는다.
다른 개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뭉치는 한 입 삼켜본다.
그리고 웃으면서 발가락 하나를 세운다.
그 모습에 짱아를 제외한 다른 개들도 먹으러 간다.
아리와 까리는 내장을 먹는다.
디즈니 영화, 《레이디와 트램프》의 스파게티 장면?(두 개(레이디와 트램프)가 스파게티를 먹다가 우연히 같은 국수가락을 빨아먹는 바람에 키스를 하게 되는 장면. 여기서는 고라니 내장으로 한다.)을 패러디한다.
뭉치와 밤이는 서로 웃으며 고라니를 뜯어 먹는다.
짱아는 꼬리가 시키는 대로 한다.
이 장면은 집개였던 이들이 시나브로 들개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인간에게서 완전히 독립하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를 보여준다.
고라니를 다 먹은 개들.
개코의 발가락 새로 저녁놀이 비친다.
딱 좋댄다.
짱아는 시식평을 남긴다.
"고라니 고기가 생각보다 연하데?"
토리는 아리와 까리에게 벌써 부부냐고 묻는다.
까리는 이게 다 자란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토리는 못 믿는다.
밤이의 회상[편집 | 원본 편집]
한편, 뭉치와 밤이는 갈밭을 거닌다.
밤이는 길가에 자란 한 풀을 바라본다.
"이 풀 이름이 뭔지 알아? 강아지풀이야. 어릴 때 생각나?"
깊이 생각해 보는 뭉치.
"아주 조금. 금방, 형제들이랑 헤어졌어. 하나둘씩.... 엄마하고도...."
"거기가 어딘지 알아? 개 공장이야."
밤이는 자신도 거기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끝없이 밤이의 동생들을 낳던 밤이의 엄마.
죽어서야 철망 밖을 끌려나간다.
그리고 그걸 어린 밤이가 지켜본다.
처음 수캐를 만난 날, 개 공장을 탈출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햇빛도 보고 바람도 맞았어. 그런 세상이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어. 난 무작정 뛰쳐 달아나고 싶었어. 햇빛을 따라, 바람을 따라, 산이고 들이고 개 공장의 냄새가 나지 않을 때까지 달렸어...!"
숨이 끊어질 때 쯤.
토리아빠가 밤이를 거둔다.
"사람들은 대체 왜, 우릴 못 살게 구는거지?"
뭉치는 조용히 밤이에게로 다가간다.
"다 잊어 버려. 여긴 우리들 세상이야. 이제 우리들끼리 여기서 행복허게 살면 돼."
둘은 임진강변으로 간다.
상류를 따라 뛰어 다닌다.
그날 밤, 뭉치는 개코와 함께 있다.
'무서운 냄새'를 찾는다.
이 컷은 이상하게도 둘 다 말은 하는데도 입을 안 움직인다.
뭉치는 폐드럼통 아래서 탄피를 줍는다.
개코에게 이거 아니냐고 묻는다.
개코는 냄새를 맡는다.
비슷하기는 한데 약하다고 한다.
여기는 사람의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이들 주변에는 사람들의 쓰레기가 널려 있다.
사냥개들과의 싸움 ― 피할 수 없는 일전 ―[편집 | 원본 편집]
한편, 사냥꾼은 컴퓨터로 자유로에서 찍힌 이들의 사진을?(근데, 이 사진들이 시민 제보자의 관점에서 찍힌 사진이 아니라, 영화의 장면들을 재사용하고 있다.) 본다.
블랙이가 유명해졌다며 낄낄댄다.
다음날 아침.
나무 아래서 자고 있던 개코.
수상한 낌새에 깨어난다.
귀를 세우고 주위를 살핀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난다.
그쪽으로 간다.
한 바퀴를 제자리서 돈다.?(개가 주변을 경계할 때 하는 행동이다.)
"사람이다!"
뒤돌아간다.
사냥꾼의 동료들이 쌍안경으로 개들을 찾는다.
개들은 멀리서 엎드려 지켜본다.
짱아는 개코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다.
개코는 이럴 리가 없다고만 말한다.
그때 사냥꾼의 찦차가 나타난다.
사냥꾼이 GPS 장비와 함께 내린다.
GPS 신호 세기를 높인다.
뭉치 뒷목에 심긴 GPS 위치 추적기.
그리고 그게 송수신하는 전기 신호.
뭉치는 이 때문에 이상 행동을 보인다.
사냥꾼들은 뭉치를 찾기 시작한다.
지도가 화천군 간동면 간척1리로 나와 있다.
화천군엔 북한강이 있지, 임진강의 지류는 없는데?
그냥 아직 파주시라고 치자.
뒷목을 벅벅 긁는 뭉치.
개코는 가만 있으라고 한다.
뭉치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는다.
사냥꾼은 손가락으로 뭉치를 정확히 가리킨다.
추적당하고 있음을 깨달은 뭉치.
뭉치는 깜짝 놀란다.
씨익 웃는 사냥꾼.
사냥개들을?(이들은 마치 그레이하운드나 휘핏, 블러드하운드 등같이 생긴 수렵견으로 보인다.) 데리러 간다.
뭉치는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짱아는 어딜 간다고 그러냐고 묻는다.
뭉치는 호숫가 끝을?(아무래도 뭉치는 임진강을 호수로 오해하고 있나 보다.) 가리킨다.
거기에 산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한다.
근데 내포리의 임진강변 주위를 위성 사진으로 보면 산이라기에는 좀 작은 언덕 수준이라 영.......
개코는 뭉치에게 사냥개들을 염려한다.
"피할 수 없다면, 싸워야죠."
짱아는 우리가 어떻게 싸우냐고 말한다.
"저 개들은 우리만큼 여길 잘 알지 못해요. 중요한 건 저 개들은, 자신들이 왜 싸우는지도 모른다는 거죠. 그저 사람이 시키는 걸 따라야 할 뿐이죠. 하지만, 우린 달라요. 우리가 뭉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요."
빙글빙글 웃는 짱아.
뭉치에게 논리 있다고 말한다.
다른 개들도 뭉치자고 한다.
자, 이제 객관적 열세와 객관적 우세, 그러니까 언더독(Underdog)과 오버독(Overdog)이 맞붙어 싸우게 된다.
사냥꾼의 신호에 사냥개 4마리가 풀린다.
사냥개들은 갈밭숲 갈림길에서 냄새를 찾고 있다.
아리가 일부러 이들 앞에 나타난다.
그래서 3마리를 유인한다.
나머지 하나는 뭉치가 유인한다.
사냥개 셋 가운데 하나.
뭔가 낌새를 눈치채고 멈춘다.
숨어있던 밤이가 튀어나와 덮친다.
그리고 다른 데로 끌고 간다.
밤이는 사냥개의 목을 문다.
사냥개의 뒷발길질에 뒤로 조금 뛴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한다.
밤이는 사냥개와 1:1로 대치한다.
한편, 나머지 사냥개 둘은 까리가 유인한다.
나무로 달려가 숨는 까리.
나무 위에는 개코.
뒷다리로 두 사냥개의 머리를 친다.
다시 돌아오는 개코의 엉덩이.
거기에 사냥개 하나가 맞는다.
개코는 땅으로 내려왔다.
다른 사냥개의 엉덩이를 걷어찬다.
나머지 하나.
까리가 박치기로 배를 때린다.
그렇게 유인한다.
개코에게 걷어차였던 사냥개.
제정신을 차리고 개코 쪽을 바라본다.
비범한 자세의 개코.
서로에게 달려든다.
서로가 서로를 덮치려 든다.
개코는 니킥으로 배를 때린다.
팔꿈치(?)로 등을 내리찍는다.
그리고 목을 조른다.
도망치려는 사냥개.
개코가 두 발로 뒤쫓아간다.
그리고 현란한 기술로 엎어뜨린다.
그리고 너에게 말한다.
"노견은 죽지 않는다!"
밤이는 사냥개와 여전히 싸운다.
밤이가 먼저 사냥개의 목을 문다.
사냥개는 몸을 흔들어 밤이를 떼어놓는다.
그리고 후려치려 달려든다.
밤이는 피한다.
사냥개를 노려본다.
높이 뛴다.
그리고 사냥개의 머리를 박치기한다.
호두알이 깨지는 소리가 난다.
사냥개는 뒤로 넘어진다.
기절.
밤이는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한편, 아리와 까리를 쫓던 사냥개.
아리와 까리가 새끼줄로 발을 걸자 넘어진다.
토리가 가슴팍 위에 올라타 시야를 방해한다.
아리와 까리와 짱아는 사지를 묶는다.
한편, 뭉치는 여전히 사냥개에게 쫓기고 있다.
호로곡처럼?(들어가는 길목은 좁지만 그 안은 호리병만큼 넓은 협곡처럼) 생긴 갈밭숲 한가운데의 공터?(뭐 완전히 공터는 아니고 나무 한 그루가 있긴 하다.).
스스로 배수진을 친다.
서로를 노려보면서 기회를 엿본다.
둘은 서로에게로 달려든다.
사냥개가 뭉치의 뺨을 후려친다.
그 다음 연달아 후려치려는 두 방의 공격.
다만, 뭉치는 피한다.
뒤이어 사냥개가 뛰어들면서 달려든다.
일어서서 역으로 덮치려던 뭉치.
사냥개의 후려침에 날아간다.
나무에 부딪힌다.
그러나, 뭉치는 곧바로 일어선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호탕하게 웃는다.
사냥개는 뭉치에게로 달려든다.
뭉치는 달려드는 사냥개를 피한다.
사냥개는 나무를 문다.
뭉치는 사냥개의 목을 문다.
사냥개는 뭉치의 배를 걷어찬다.
뭉치는 넘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자세를 가다듬는다.
다른 사냥개들을 제압하고 온 개들.
이들이 뭉치에게로 왔다.
그러나 아무도 안 도와준다.
썩을 잡것.
사냥개는 침을 한 번 퉤 뱉는다.
그리고 뭉치에게 달려든다.
뭉치도 달려든다.
서로가 서로를 덮치려는 모습이다.
그 누구도 상대에게 꿀리지 않는다.
서로는 서로의 목을 물려고 한다.
앞발로 서로를 밀면서 막는다.
뭉치는 뒤로 뛴다.
다시 자세를 바로잡는다.
달려드는 사냥개를 간단히 피한다.
뒷발길질로 걷어찬다.
그리고 사냥개의 목을 문다.
그러나 사냥개가 머리를 세게 흔든다.
뭉치는 다시 자세를 바로하고 대치한다.
다시 이들은 서로에게 달려든다.
목을 물려고 안간힘을 쓴다.
뭉치가 머리로 사냥개의 턱을 박치기한다.
사냥개가 넘어진다.
뭉치는 바로 달려든다.
사냥개도 금세 일어섰다.
뭉치에게로 달려든다.
정면돌파를 할 것 같던 뭉치.
옆으로 피해 간다.
그리고 뭉치는 나무 기둥을 밟고 도약한다.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돈다.
낙차로, 온몸으로 사냥개를 눌러 버린다.
여하간, 제작진이 액션에도 꽤 공을 들였나 보다.
다른 개들이 환호한다.
그리고 뭉치는 두 다리로 일어선다.
일어선 사냥개를 힘으로 밀어 넘어뜨린다.
그리고 사냥개의 목을 물어 버린다.
사냥개가 애걸한다.
"잠깐잠깐잠깐잠깐...."
뭉치는 놓아주려는 척을 한다.
다시 입을 쩍 벌리고 사냥개에게로 확 들이민다.
이로써 확실히 제압한다.
"잠깐만......."
자, 언더독의 반란이다.
언더독이 오버독이 되었다.
아하! 위버훈데(Überhunde)?(Overdogs)!
불 속에서의 탈출 ― 살아남은 개들 ―[편집 | 원본 편집]
사냥꾼은 뭉치가 있는 데로 온다.
뭉치에게 제압된 사냥개.
사냥꾼들은 이를 보고 놀란다.
뭉치는 다른 개들을 데리고 도망친다.
사냥개는 비굴하게 꿇어 앉는다.
사냥꾼의 눈치를 본다.
"이런 밥값도 못 하는...."
사냥꾼은 개들이 사라진 쪽을 본다.
갈대가 흔들리는 쪽.
뭉치가 뛰어다니는 게 보인다.
사냥꾼은 실탄을 마구잡이로 발사한다.
거기서 튄 불똥이 갈대를 태우기 시작한다.
다른 사냥꾼이 말리려 한다.
성질이 뻗친 사냥꾼은 계속 쏜다.
갈대밭의 불길이 빠르게 번진다.
다른 사냥꾼은 먼저 도망친다.
뒤늦게서야 상황 파악을 한 사냥꾼.
사냥개를 데리고 그냥 가버린다.
그리고 불길은 갈밭 전체로 번진다.
개들은 불을 피하려 도망친다.
가는 곳마다 불길이 치솟는다.
뭉치는 바위에 오른다.
피신할 만한 곳을 찾는다.
경로를 고려해 본다.
다른 개들은 반대쪽으로 도망치려고 한다.
밤이는 뭉치를 불러 가자고 한다.
이들이 가는 곳마저 불길이 막아버린다.
뭉치는 밤이에게로 다가간다.
잠시만 다녀오겠다고 한다.
바위를 뛰어넘어 어디론가 간다.
밤이도 왜 그러냐면서 뒤따라가려고 한다.
불길이 치솟아 막아버린다.
한편, 사냥꾼의 추적기의 신호가 끊긴다.
"다 죽은 거야...? 에이!"
사냥꾼은 급히 차를 후진시킨다.
뭉치는 머리로 드럼통을 굴린다.
그리고 개들이 있는 데로 몰고 온다.
소형견들에게 드럼통 안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대형견들은 드럼통을 밀기로 한다.
뭉치가 방향을 가리킨다.
다른 개들과 함께 민다.
강 쪽으로 몰고 간다.
나무 한 그루가 불에 타 쓰러진다.
맞을 뻔했다.
이들은 계속 달린다.
그러나 드럼통을 모는 속도가 느려진다.
뭉치는 드럼통 위에 반대로 오른다.
그 위에서 드럼통을 굴린다.
하필 이 다음이 내리막길이다.
박혀 있는 바위에 드럼통이 날아갈 뻔했다.
뭉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드럼통 안의 개들은 원심분리가 된다.
드럼통은 오르막을 타고 날아오른다.
드럼통 안의 개들은 밖으로 빠져 나온다.
이들은 강물에 빠진다.
뒤늦게 밤이와 개코가 달려온다.
물 위로 먼저 드럼통이 떠오른다.
그 다음엔 토리, 아리, 까리가 순서대로 나온다.
뭉치는 짱아를 물고 나온다.
다들 괜찮냐고 개코의 묻는다.
짱아는 괜찮아 보이냐고 말한다.
아리와 까리는 같은 자세로 쓰러진다.
짱아는 배에 없었던 화상이 생겼다.
이들은 불타는 갈밭을 바라본다.
"어서들 가요. 물가를 따라가면, 안전해요."
뭉치가 말했다.
밤이는 뭉치에게 괜찮냐고 묻는다.
개코는 퍽 실망한 채로 걸어간다.
짱아는 천천히 가라고 한다.
물집이 잡혔다.
아리와 까리는 따갑다고 말한다.
개들의 여정 2[편집 | 원본 편집]
개들의 여정 2[편집 | 원본 편집]
짱아를 업은 개코.
여전히 '무서운 냄새'를 찾고 있다.
아리는 뭉치에게 업혔다.
등짝이 듬직해서 좋다고 한다.
까리는 밤이 등빨도 좋다고 한다.
밤이는 토리에게 괜찮냐고 묻는다.
싱글벙글 웃는 토리.
제 발바닥은 두껍다고 한다.
한편, 사냥꾼은 뭉치의 GPS 신호를 잡는다.?(이때, 나타난 지도의 일부 도로가 아이패드의 베젤까지 나있다.)
화천군 간동면 간척1리다.
사냥꾼은 살아있다며 좋아한다.
다음날 아침.
개코를 선두로 길가를 걷는 개들.
아리는 뭉치에게 괜찮냐고 묻는다.
뭉치는 말없이 웃는다.
이들은 군부대를 지난다.
군용차가 지나간 자리.
개코는 그 냄새를 맡는다.
익숙한 풍경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철도를 따라 걷는다.
철망으로 막힌 터널을 본다.
저들은 옛 경원선을 지나는 것인가?
그렇다면 거기는 철원의 백마고지역 너머임이 분명하다.
화면 전환.
굉장히 어둡다.
토리가 '우아!'하고 놀란다.
짱아는 그걸 듣고 놀란다.
아리가 묻는다.
"우리가 거기를 가면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 어... 어어... 그럼!"
개코는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자기 자신도 확신이 안 서나?
아리는 가서 뭘 제일 하고 싶냐고 묻는다.
토리는 엄청 큰 멧돼지를 잡을 거라고 말한다.
개코는 물이나 한 잔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물맛이 끝내준다고 덧붙인다.
아리는 새끼를 낳을 거라고 말한다.
짱아는 사랑부터 하겠다고 작게 말한다.
터널 반대편으로 나온 개들.
온갖가지 꽃들이 만개했다.
아리는 딴 세상이라며 놀란다.
까리는 공기 맛도 다르다고 한다.
아마 민통선을 넘었나 보다.
이들은 계속 간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이 사는 집.
한 개(지구)가 나온다.
이들에게 어디 가냐고 묻는다.
그리고 지구 뒤에는 달과 부릉이가 나온다.
달은 왼눈을 잃은 시추다.
부릉이?(《마당을 나온 암탉》에 나왔던 양계장 문지기랑 똑같이 생겼다. 다리 잃은 것만 빼면.)는 뒷다리를 잃었다.
밤이는 사람의 집이니 빨리 가자고 한다.
개코도 거의 다 와 간다고 하며 가자고 한다.
그러나 아리는 쉽게 발을 떼지 못한다.
아리는 다들 많이 지쳤다고 말한다.
까리도 지쳤다고 말한다.
뭉치는 밤이를 바라본다.
밤이는 집 쪽을 바라본다.
이들은 그 집 마당으로 들어와 본다.
그때 집 뒤편의 산.
이효리-이상순 부부를 닮은 노부부가 아메리카너구리(라쿤)를 안고 내려온다.
저 노부부가 안 그래도 이효리와 이상순을 모델로 그렸다니 이 둘을 그냥 '이효리'와 '이상순'으로 지칭하겠다.
엔딩 크레딧에는 누가 누구인지 안 알려준 채로 이름만 적혀서 말이다.
이효리는 지구와 달과 부릉이를 부른다.
사람의 목소리에 밤이는 크게 경계한다.
다른 개들도 멀찍이 떨어져 짖으며 경계한다.
그러나 지구와 달과 부릉이는 당장에 달려간다.
제 집 마당에 나타난 일곱 마리의 개.
이 노부부는 이 개들을 단체손님이라며 신기해 한다.
이효리가 멀찍이서 한 발만 내딛는다.
이 개들은 뒤로 몇 걸음 물린다.
아메리카너구리가 다리 때문에 낑낑댄다.
이상순은 아메리카너구리를 봐주러 간다.
어쩌다 보니 맨 앞으로 나와 있는 짱아.
이효리는 짱아에게 다가간다.
단번에 짱아의 이름을 맞힌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내민다.
경계심이 너무 앞선 짱아.
짱아는 이효리의 손가락을 물어 버린다.
다들 그 행동에 놀란다.
짱아는 자기가 괜한 짓을 했나 하고 걱정한다.
이효리는 허하게 웃는다.
"어쭈? 한 성질 하는데?"
짱아는 배를 까보이며 드러눕는다.
이효리는 그걸 보고 크게 웃는다.
그러다가 짱아의 화상을 발견한다.
이효리는 짱아를 들어올린다.
약을 발라주겠다고 안는다.
아리와 까리도 발을 들어보인다.
같이 해달라고 한다.
이효리는 개 세마리를 봐주러 간다.
나머지 개들에게는 그늘에서 쉬고 있으라고 한다.
뭉치는 나무에다가 뒷목을 계속 긁는다.
뒷발로 뒷목을 턴다.
이를 반복한다.
밤이는 뭐 하는 거냐고 묻는다.
뭉치는 말없이 웃는다.
문이 열린다.
까리가 신발 자랑을 한다.
아리는 불편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뒤이어 짱아가 나온다.
근데, 이 장면은 이상하게도 짱아가 1프레임간 1번 움직이는 동안에 아리와 까리는 2프레임에 1번씩 뚝뚝 끊어지며 움직인다.
짱아는 머리를 뺀 나머지 털이 다 깎였다.
또 입질로 덧나지 않게 목에 뭔가를 두르고 나온다.
토리부터 밤이까지 졸라배를잡고 웃었다.
의기소침해진 짱아.
짱아에게로 달이 다가온다.
짱아는 달을 보고 꼬리가 흔들린다.
꼬리에게 가만 있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둘은 통성명을 한다.
노부부는 개들에게 사료를 가득 내줬다.
노부부는 멀찍이 떨어져 앉아 차를 마신다.
저들은 어디를 가는 길일지를 궁금해 한다.
밤이와 뭉치가 이들을 바라본다.
이효리는 이상순에게 마음 편히 먹게 두자며 안으로 들어간다.
아리는 사료를 먹으면서 고기가 먹고 싶다고 말한다.
까리도 그걸 받으며 고라니를 상상한다.
개코가 이들에게 말한다.
"뭐야 니들? 완전 들개 다 돼 버렸네?"
어투는 반농담이다만, 분명 빈말이 아니다.
피와 생고기 맛을 본 이들은, 다신 길들여지지 않을 터이니까.
뭉치는 또 GPS 신호를 느낀다.
"아!"
주위를 둘러본다.
밤이가 걱정한다.
뭉치에게 왜 그러냐고 묻는다.
뭉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깊은 사색에 잠긴다.
지구와 달과 나[편집 | 원본 편집]
보름달이 뜬 그날 밤.
이상순은 기타를 조율한다.
몇 번 튕겨본다.
연주를 시작한다.
뭉치와 토리와 밤이를 뺀 다들.
모닥불 주위에 몰려있다.
토리도 거기로 가본다.
밤이는 구태여 막지 않는다.
이상순은, 이승환의 '지구와 달과 나'를 부른다.
지구에서 제일 까부는 천방지축 지구 (카메라는 이상순의 얼굴을 핥는 지구를 비춘다.)
많이도 아파서 더 마음이 쓰이는 달 (카메라는 짱아와 달을 비춘다.)
너흰 스러지는 마음을 메우지 (부릉이는 나무의자에 올라가려는 토리를 도와주고, 참새가 이들 곁에 내려온다.)
매일매일 애틋한 반가움으로 (개코는 까리의 신발을 벗기려다가 까리가 개코의 꼬리를 무나 개코는 신경쓰지 않는다.)
지구와 달과 나 (이효리의 품에 안겨 아메리카너구리가 하품을 한다. 이효리도 같이 부른다. 모두가 이 둘을 집중하여 바라본다.)
지구와 달과 나 (고라니 한 마리가 이들 곁에 조용히 다가와 앉는다. 이효리는 가만히 고라니를 쓰다듬는다. 개들 중 아무도 얘를 잡자고는 말을 않는다. 다람쥐 한 마리가 사료그릇에 들어가 사료를 먹으려 하자 까리가 빼앗으려 한다. 아리는 까리에게 그러지 말라고 한다.)
네가 달려올 때 네가 안길 때
난 네 친구고 우린 가족이라고 해
(간주) (다람쥐 두 마리가 더 나타나 이상순의 기타와 팔을 타고 다닌다. 기타 소리에 여우 두 마리가 호기심을 갖고 들어온다. 이미 토끼들도 와 있다. 밤이와 뭉치는 여전히 멀찍이 떨어진 장독대 근처에 있다.)
(점프)기쁨이 쌓일수록 슬픔을 당겨 써
먼저 떠나 보내야 한단 걸 알기에
더 놀아주고 더 많이 같이 있을게
언젠가 너무 많이 울지 않으려면
지구와 달과 나 (노래는 벌써 클라이막스에 달한다. 다 자란 멧돼지 하나와 새끼 멧돼지 세 마리, 이름 모를 산새, 까마귀, 흑묘백묘, 족제비, 박쥐, 심지어 아시아흑곰?(반달가슴곰)까지도 박수로 리듬을 치며 노래를 감상한다.)
지구와 달과 나 (뭉치는 밤이를 두고 담을 넘어서 산 속으로 간다. 밤이가 그걸 본다. 산 속으로 가던 뭉치는 밤이를 한 번 보고는 산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간다.)
내가 오는 소리만 기다리는 너흴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페이드아웃)지구와 달과 나 (뭉치는 산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다.)
지구와 달과 나 (뒤에서 밤이가 다가온다.)
(이후 끊음.)맛있는 거 먹고 좋은 데 가자
그러니까 제발 오래만 살아줘
long overdue but...
always better than never!
a family of one
one love...
지구와 달과 나
지구와 달과 나
맛있는 거 먹고 좋은 데 가자
그러니까 제발 오래만 살아줘
지구와 달과 나
지구와 달과 나
지구와 달과 나
지구와 달과 나― 이승환, 지구와 달과 나
밤이는 뭉치에게 조금 딱딱한 어투로 묻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사냥꾼 때문이야?"
뭉치는 제 목덜미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뒷목에 난 핏자국을 보여준다.
저거 원래 없었는데?
자기가 따라가면 다들 위험해질 거라고 말한다.
"그 인간이 노리는 건 나야."
"그 때문에 나를 쫓아오는 거지."
밤이는 살짝 놀란다.
뭉치는 자신이 밤이와 함께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밤이는 그래야만 하겠냐고 말한다.
뭉치에게 같이 가자고 한다.
뭉치도 끝까지 함께 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한다.
뭉치의 곁에서 머리로 쓰다듬던 밤이.
뭉치를 절대로 홀로 둘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한다.
소쩍새가 우는 소리.
밤은 깊어만 간다.
사냥꾼의 추격[편집 | 원본 편집]
사냥꾼의 추격[편집 | 원본 편집]
다음날 새벽.
산골로 찦차 한 대가 들어온다.
산 속에서 밤이와 함께 있는 뭉치.
홀로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강한 GPS 신호를 느낀다.
사냥꾼이 다가오고 있음을 짐작한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자는 밤이.
뭉치는 밤이를 두고 홀로 떠난다.
찦차를 모는 사냥꾼.
뭉치가 반대방향으로 가는 것을 본다.
사냥꾼은 차를 돌려 뭉치를 쫓는다.
밤이는 엔진 소리를 듣고 깬다.
뭉치가 없어진 것을 안 밤이.
뭉치를 찾으러 나선다.
붉은 낙엽이 떨어진 숲.
그 사이에 난 길.
뭉치는 그 길을 따라 도망친다.
아주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영화에서 단 둘 뿐인 전지적 작가 시점인 장면이다.
뭉치는 길이 아닌 곳으로 달려간다.
찦차도 놓칠세라 뭉치만 쫓아간다.
살아남기 위해 달린다는 토리아빠의 말이 생각나지 않는가?
울퉁불퉁한 내리막 앞.
뭉치가 뛴다.
찦차도 따라서 뛴다.
카메라 구도가 마치 할리우드 영화 같다.
뭉치는 왼쪽 급커브를 돈다.
통나무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뭉치는 통나무를 뛰어서 넘는다.
뭉치가 재래시장에서 처음 쫓길 때와는 달라졌지 않은가?
찦차는 그대로 들이박는다.
울퉁불퉁한 언덕을 굴러 떨어진다.
뭉치는 그 충격으로 날아가 구른다.
엎어진 차.
사냥꾼은 총을 챙기고는 뛰어내린다.
그리고 뭉치를 조준한다.
뭉치는 사냥꾼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으르렁거린다.
뭉치를 찾으려고 달리던 밤이.
총성을 듣고는 그쪽으로 달려간다.
총알이 나무에 박힌다.
뭉치는 피한다.
그 다음 총알은 바닥에 박힌다.
또 뭉치는 도망친다.
사냥꾼은 뭉치를 쫓으면서 총을 쏜다.
달리던 뭉치.
철사 덫을 미쳐 보지 못했다.
오른쪽 뒷다리가 거기에 걸려 넘어진다.
뭉치는 철사를 끊어보려 한다.
그러고 보니, 토리아빠가 뭉치에게 '이빨로 쇠를 자를 순 없다'라고 했잖나?
사냥꾼은 이미 뭉치의 근처에 왔다.
사냥꾼은 블랙이만 기다리면 되겠다고 한다.
뭉치는 사냥꾼에게 짖어댄다.
사냥꾼은 개머리판으로 뭉치의 머리를 후려치려는 시늉을 한다.
사냥꾼은 20년 경력을 자랑한다.
그러더니 뭉치에게 이런 말을 한다.
"개란 짐승이, 아! 이게 아주 멋진 짐승이란 말야. 주인에게 목숨을 바쳐서 충성을 다하거든. 흐흐흐흐. 근데 가끔 지가 갠 줄 모르고 사람에게 대드는 놈이더라고. 주인도 몰라보는 미친 놈들은 절대 가만 안 둔단 말야. 알겠어!"
뭉치는 덫에서 빠져 나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런 뭉치에게 밤이가 달려오는 게 보인다.
"안 돼!"
사냥꾼은 밤이가 달려오는 걸 알아챘다.
조준경으로 조준을 한다.
밤이는 계속 달려온다.
방아쇠를 막 당기려는 사냥꾼.
뭉치는 덫이 설치된 나뭇가지를 부러뜨린다.
그리고 사냥꾼을 덮친다.
총알은 빗나간다.
사냥꾼은 뭉치의 무게에 넘어진다.
뭉치를 떼어 놓으려다가 총을 놓친다.
총은 밤이의 발에 밟힌다.
두 개는 사냥꾼에게 으르렁거린다.
사냥꾼은 단도를 꺼낸다.
쌍으로 미쳤냐고 한다.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밤이는 거기에 앞쪽 오른쪽 다리를 베인다.
사냥꾼은 계속 단도를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그러나 단도가 나뭇가지에 박힌다.
이것도 좀 연출적인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냥꾼.
뭉치는 사냥꾼을 가슴팍을 밀어 넘어뜨린다.
밤이는 넘어진 사냥꾼 위로 올라탄다.
그리고 목을 물려 한다.
사냥꾼은 저항한다.
결국 목을 물린다.
더 이상 반항하지 않는다.
"미, 미안해...."
밤이는 물던 것을 놓는다.
"우릴 그냥 내버려 둬...!"
그리고 밤이는 사냥꾼에게서 내려온다.
사냥꾼은 뒷걸음질 친다.
두 개는 으르렁거린다.
뭉치는 계속 짖는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사냥꾼은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사냥꾼은 다시 일어서면서 태도가 돌변한다.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러면서 뒷걸음질 친다.
지뢰 구역이라는 철사 울타리에 걸린다.
또 뒤로 굴러 넘어간다.
뭉치는 사냥꾼을 보고 계속 짖는다.
한참 뒤, 길을 잃은 사냥꾼.
사냥꾼이 헤매고 있다.
한 걸음을 내딛는다.
'딸깍'하는 소리가 난다.
'미확인 지뢰 지대'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사람 없냐고 말한다.
그리고 큰 소리로 '사람 살려!'라고 외친다.
카메라 줌아웃.
첩첩산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뭉치와 밤이는 내려가는 길이다.
덫이 걸린 나뭇가지를 질질 끌고 가는 뭉치.
철사 덫이 살을 점점 파고든다.
뭉치는 아파한다.
밤이는 자기가 먼저 그 사람들에게 보이자고 말한다.
뭉치는 말없이 웃으며 끄덕인다.
밤이는 덫이 걸린 나뭇가지를 문다.
그리고 뭉치와 꼭 붙어서 간다.
이별[편집 | 원본 편집]
그날 저물녁.
노부부는 이 둘의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로 감아준다.
뼈까지 파고들지는 않았댄다.
이효리는 밤이의 목을 끌어 안는다.
밤이는 큰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효리는 붕대가 커플링 같지 않냐고 말한다.
뭉치는 한 번 짖는다.
밤이와 마주보고 선다.
그걸 본 이효리는 뭉치에게 가볍게 개 짖는 소리를 두 번 낸다.
밤이도 이효리를 따라 두 번 짖는다.
멀찍이 떨어져서 보고 있는 토리.
보기 좋다고 말한다.
화면 전환.
밤이와 뭉치는 앉아서 쉬고 있다.
밤이는 뭉치에게 괜찮냐고 묻는다.
뭉치는 괜찮다고 한다.
밤이에게도 어떠냐고 묻는다.
밤이는 붕대를 보고는 웃으며 좋다고 말한다.
이상순은 앉아서 기타를 연주한다.
개코는 이제 얼른 가자고 한다.
아리는 '고라니 먹으러 가즈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짱아를 찾는다.
짱아는 집 안에 있다.
격하게 흔들리는 꼬리.
그렇게 좋으냐면서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
짱아는 꼬리에게 알겠으니 그만하라고 한다.
밖으로 짱아는 개들에게 양심고백을 한다.
"나... 사람을 좋아해"
놀라는 개들.
"사랑해."
다들 그 말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떡 벌어진다.
개코는 대박이라고 말한다.
"왜? 우째? 나 같은 개는 사람 좋아하면 안 돼? 이번엔... 나가 인간을 선택한 것이여."
그러니깐, (사람이 자신을 선택한 게 아니라) 자신이 인간을 선택한 것이라는 게다.
조금 고민하던 뭉치.
"저기... 대장은 그럼 여기 남으세요. 그게 대장 생각이라면. 나는 갈 거예요. 나도... 내가 생각한 대로 살고 싶어요."
짱아는 다른 개들에게도 정말 끝까지 갈 거냐고 묻는다.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짱아는 뭉치에게 울먹이며 말한다.
"그래...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뭉치야."
그 말에 뭉치는 짱아를 안는다.
"니를 만나서, 나도 내 생각을 제대루 찾은 거 같애.... 고맙다, 뭉치야."
"대장, 정말 고마웠어요. 대장이 아니었으면, 전 정말로 버려진 개로 살아가고 있었을 거예요."
훌쩍이는 짱아.
"참 말을 예쁘게 허네..."
짱아는 눈에다가 부채질을 한다.
다른 개들도 짱아에게 진짜 잘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상순의 기타 연주는 끝난다.
이들은 짱아만 남겨두고 떠난다.
토리가 짱아를 부른다.
그리고 고라니 똥 먹으면 안 된다고 소리친다.
달은 짱아에게 똥도 먹냐고 묻는다.
짱아는 헤어질 때 인사라고 둘러댄다.
노부부는 이 나그네 개들을 배웅한다.
그리고 팔을 높이 흔든다.
잘들 가라고 소리친다.
몸조심도 당부한다.
이상순은 잘 살라고 외친다.
다른 개들도 잘 가라고 짖는다.
철책을 넘어 그곳으로[편집 | 원본 편집]
마침내 그곳으로[편집 | 원본 편집]
냄새만을 쫓아 길을 찾던 개코.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a.k.a. 대성동).
그곳의 높은 깃대에 걸린 태극기를 본다.
즉각 일어서서 거수경례를 한다.
그러니까 내 추측이 맞다면, 이들은 북한산?(개 농장 장면을 보아 아마도 양주시 인근이었을 게다.)-연천 혹은 포천?(파주보다 북쪽)-파주?(경기도 서쪽, 연천군과 포천시의 서남쪽)-화천?(강원도)-철원?(경원선)-파주?(대성동)라는 이상한 루트를 돌고 돈 셈이다.
개코는 호탕히 웃는다.
이제 다왔다고 말한다.
가자고 말하며 달려간다.
다른 개들도 개코를 따라 달린다.
개코가 멈춰선다.
다른 개들도 멈춘다.
이들은 눈이 확 트이고 입이 벌어진다.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한다.
이들 앞에 펼쳐진 풍경.
산과 들이 번갈아가며 끝없이 늘어있다.
완전히 자연 중의 자연이다.
개코는 코로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그리고 여길 다시 온 것에 감격한다.
뭉치에게 수고했다고 말한다.
뭉치는 개코에게 굉장히 고요하다고 말한다.
밤이는 개코에게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까리는 소곤히 진짜 조용하다고 말한다.
아리도 모든 게 멈춰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개코는 원래 그런 데라고 말한다.
그때, 토리가 뭔가를 본다.
그쪽을 가본다.
토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다른 개들도 토리에게로 가본다.
군인들이다.
철책을 두들기며 점검하고 있다.
밤이는 개코에게 사람들이 없다고 했잖느냐고 묻는다.
개코는 저 사람들은 저 안으로(DMZ 안으로) 사람들이 못 들어오게 우릴 지켜줄 사람들이라며 안심시킨다.
뭉치는 개코와 끝없이 늘어선 철책을 본다.
개코에게 여길 어떻게 잘 아느냐고 묻는다.
개코는 정자세로 앉는다.
그리고 이곳이 자신이 근무하던 곳이라고 밝힌다.
까리는 근무라는 말에 의아해 한다.
남방한계선의 통문 앞.
군인들끼리 암구호를 확인하고 있다.
개코는 저 통문 두 개가 모두 열리면 한꺼번에 달려들어 넘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뭉치가 개코에게 되묻는다.
개코는 기습적으로 달려가면 승산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적의 허를 찌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토리는 사람들을 찌르는 거냐고 개코에게 묻는다.
개코는 아니라고 말한다.
뭉치는 위장크림을 바른 군인들을 본다.
뭔가 달라 보인다고 말한다.
개코는 단지 화장한 것 뿐이라고 말한다.
까리는 흉하다고 말한다.
한편, 군인들은 최종 점검을 한다.
그런데 박 일병이?(엔딩 크레딧에는 '수류병사'라고 나온다.) 수류탄을?(세열수류탄을) 떨어뜨리는 실수를 범한다.
수류탄을 급히 주워 차는 박 일병.
선임하사는?(계급은 중사. 엔딩 크레딧에는 '선임하사'라고 나온다.) 박 일병에게 정신 못 차리냐고 말한다.
박 일병은 아니라고 크게 답한다.
선임하사는 뒤돌아서서 통문을 열라고 지시한다.
첫번째 통문이 열린다.
개코는 자신이 신호하면 한꺼번에 달려드는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납작 엎드린다.
두번째 통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린다.
두번째 통문도 활짝 열렸다.
개코는 '돌격 앞으로!'를 외치고 뛰쳐 나간다.
선임하사는 웬 개떼가 달려들어 첫번째 통문을 넘자 빨리 통문 닫으라고 말한다.
개코를 선두로 여러 개들은 사람들을 피한다.
그러면서 두번째 통문으로 달려든다.
사람 다리 사이로 지나가던 아리.
옷의 후드가 총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이를 본 뭉치는 가다가 되돌아간다.
아리를 닫히는 통문 사이로 던져 넘긴다.
정작 자신은 통문이 닫혀 잠기는 바람에 넘지 못한다.
군인들은 뭉치를 잡으려고 달려든다.
하긴, GPS 추적기를 달고 있는 데다가 월경을 하려 했으니 거수자라면 거수자이잖은가.
만약 뭉치가 잡혔다면 어떤 고초를 겪었을까.
뭉치를 잡으려던 박 일병.
수류탄을 떨어뜨리고 만다.
그리고 수류탄은 여러 사람들의 발에 차인다.
그걸 본 뭉치는 수류탄을 먼저 낚아채어 문다.
군인들은 함부로 다가가지도 못한다.
선임하사는 뭉치에게 위험한 거라고 말한다.
착하니까 이리 내라고 한다.
다른 군인들과 함께 조심스레 다가간다.
뭉치는 공격 준비 자세를 잡는다.
한 번 짖으면서 수류탄을 투척하는 시늉을 한다.
모든 군인들이 놀라서 넘어진다.
DMZ를 넘어[편집 | 원본 편집]
뭉치는 먼저 넘어간 쪽을 한 번 바라본다.
갑자기 반대쪽으로 달린다.
엎드린 군인들을 날아서 넘는다.
선임하사는 뭉치를 잡으라고 말한다.
뭉치는 서쪽으로 철책을 따라 달린다.
살아남기 위해 달린다는 토리아빠의 말이 생각나지 않는가?
먼저 넘어간 쪽에서도 뭉치를 따라 달린다.
여섯 군인들은 뭉치를 뒤쫓아간다.
다른 초소에서도 뭉치를 보고 다섯 명이 잡으러 나온다.
뭉치는 참호로 뛰어든다.
그리고 참호를 따라 달려간다.
열한 명도 같이 뛰어든다.
뭉치는 마주 오는 군인 셋을 본다.
두 사람은 농락하여 넘어뜨린다.
하나는 잡으려고 숙이는 것을, 등허리를 밟아 참호 밖으로 뛰쳐 나간다.
다른 개들은 잘한다고 응원하면서도 계속 달리라고 말한다.
달리는 뭉치.
철책과 언덕을 본다.
언덕 쪽으로 올라간다.
도움닫기를 한다.
그러나 높은 철책, 멀었던 언덕과 철책 사이 거리로 결국 되떨어진다.
염소농장 털이가 별 도움은 안 됐나 보다.
달려오는 군인들.
뭉치는 이들을 보고 다시 달린다.
또 마주 오는 군인들.
뭉치는 언덕으로 올라간다.
그러더니 초소 안으로 들어간다.
초소 안에는 한 군인이 있었다.
뭉치는 그 품에 안긴다.
군인들은 뭉치를 잡으라고 한다.
그러더니 다시 수류탄을 잡으라고 횡설수설한다.
뭉치를 안은 군인은 뭉치가 벗어나지 못하게 꽉 붙잡는다.
그러나 뭉치가 얼굴을 핥자 결국 놓아 버린다.
군인들은 급하게 계단을 타고 내려온다.
그러다가 다들 넘어진다.
볼링핀 넘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뭉치는 이 군인들에게 세 번 짖는다.
그리고 수류탄을 주워 초소 밖으로 나간다.
개코는 뭉치에게 초소의 지붕 위로 올라가라고 한다.
뭉치는 다시 병영 안으로 들어간다.
지붕 위로 올라가려니 군인들이 튀어 나온다.
뭉치는 지붕까지 최대한 도움닫기를 할 수 있게 달린다.
그리고 끝에서 뒤돌아 선다.
군인들은 뭉치가 또 수류탄을 투척할까 하여 멈춘다.
이들은 조금 대치한다.
뭉치가 먼저 달려든다.
군인들도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달려든다.
뭉치는 군인들의 하이바를 밟고 사람을 피한다.
제 앞을 막는 군인들은 가슴팍을 밀어 넘어뜨린다.
사람들을 농락하여 넘어뜨린다.
날고, 다시 도움닫기할 준비를 한다.
그리고 달려간다.
뭉치는 하이바를 징검다리처럼 밟고 건넌다.
아무도 뭉치를 잡지 못 한다.
뭉치는 마침내 지붕 위로 올라갔다.
달려간다.
그리고 뛴다.
뭉치가 날아오른다.
수류탄의 핀이 뽑혀 떨어진다.
뭉치가 입을 다문다.
수류탄은 이미 철책과 철책 사이의 꽃밭에 떨어졌다.
뭉치에게도 도움닫기가 좀 부족했다.
뭉치도 철책과 철책 사이로 떨어진다.
그때 수류탄이 터졌다.
그 충격으로 뭉치가 다시 날아오른다.
슬로모션.
그와 함께, 뭉치의 주위에는 꽃잎이 흩날린다.
샛노란 꽃잎이 흩날리는 풍경.
개들은 이에 눈과 입이 딱 벌어진다.
어쩌면 제작진들은 사실성을 버려서라도 저들에게 축포를 쏘고 싶었을는지도 모르겠다.
군인들도 이 모습을 보고 넋을 잃는다.
개들은 뭉치가 떨어질 지점으로 달려간다.
뭉치는 여전히 슬로모션 속에 있다.
흩날리는 꽃잎과 함께 DMZ를 넘어 날아오른다.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말로 표현 못할, 짜릿한 자유로움과 해방감.
뭉치는 이를 만끽한다.
"아...! 하아...! 하...! 아...... 아하...! 아하하...! 아하하...! 아하하하하...! 아하...!"
떨어지는 뭉치.
밤이와 겹쳐져서 언덕 아래로 구른다.
뭉치가 아래, 밤이가 위다.
샛노란 꽃 하나가 이들 곁에 툭 떨어진다.
설마 이건 《동백꽃》인가?
밤이는 뭉치의 왼쪽 뺨을 여러 번 핥는다.
개코는 뭉치에게 아주 잘했다고 여러 번 말한다.
그리고 밤이는 뭉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바보 뭉치야."
꿈꾸는 그곳 ― 에필로그 ―[편집 | 원본 편집]
엔딩 크레딧. 김소희가 부르는 '꿈꾸는 그곳'이 들린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 (밤이는 뭉치를 안는다. 뭉치는 얼굴에 홍조를 띤다. 토리는 개코와 뛰논다.)
눈앞에 비친 낯설은 세상 (까리는 옷을 벗어 그동안 숨겨왔던 복근을 아리에게 드러낸다.)
내 주위를 가득 채우던 (개들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들어간다. 뭉치는 DMZ를 뒤돌아본다. 군인들이 잘 가라고 웃으면서 손을 크게 흔들어준다.)
그 쓸쓸한 공기 (개들은 숲 속으로 들어간다.)
머리 위로 부는 바람에 (개코는 뭉치를 데리고 와서는 땅을 파헤친다. 그리고 지뢰를 꺼내며 '무서운 냄새'의 정체를 알려준다.)
문득 다시 고갤 들었을 때 (뭉치와 개코는 땅을 파헤치며 지뢰들을 꺼낸다.)
어느샌가 지친 내 곁을 (고라니와 멧돼지가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토리가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나 물고기가 다 도망간다.)
함께 지켜준 소중한 너 (까리는 튀어오른 물고기를 라이트 훅으로 물고기를 때려 잡는다.)
끝없는 밤을 지나서 (뭉치는 뒷다리로 물고기를 던져서 밤이에게 먹인다.)
새벽을 건너 아침이 와도
그날을 기억할게 (개코는 그냥 잡는다.)
행복을 찾아 함께 달려가 (토리가 이번엔 토끼 사냥을 하려 한다. 토끼가 도망치자 토리도 토끼를 뒤쫓는다.)
꿈꾸는 그곳으로 (어느 가을날, 뭉치와 까리와 개코가 굴 앞에 있다. 뭉치는 왔다갔다 하며 안절부절해 한다. 그때 굴 속에서 무슨 소식을 듣고 다들 그 쪽을 바라본다.)
가파른 언덕을 지나 (토리도 끼어든다. 밤이와 뭉치 사이에 강아지 세 마리가 태어난다. 정작 이곳에 와서 새끼를 낳고 싶다던 누구는 아직 소식이 없다.)
하늘을 날아 숨이 차올라
주저앉고 싶을 때 (뭉치는 크게 웃는 표정으로 울면서 만세를 부르짖는다.)
내 손을 잡고 다시 일어나 (한편, 효리네 민박에서도 짱아와 달 사이에서 강아지 너댓 마리가 태어난다.)
절대 놓지 않을 거야 (다시, DMZ의 밤, 아리와 까리는 밝게 빛나는 반딧불을 본다. 다른 개들도 반딧불이 풀숲을 날아다니는 것을 바라본다. 토리는 반딧불을 보며 뛰논다.)
(간주) (군인들만 죽어나갈 DMZ의 겨울, 흑염소 두 마리가 남방 한계선 이남의 한 언덕에 서 있다. 굴 속엔 뭉치와 밤이의 자식들이 개코와 함께 있다. 그 중에서도 밤이를 닮은 강아지는 개코의 귀를 물고 늘어지나 개코는 개의치 않는다.)
어두운 숲속을 헤매여도 (다른 개들은 굴 위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달빛 따라 길을 찾을 거야 (카메라는 능선을 따라 끝없이 늘어선 철책을 비춘다.)
느닷없이 내린 소나기가 (그리고 눈 내리는 흰 하늘에 검은 글씨로 제목, 언더독이 나타난다.)
너와 내 앞을 막아서도
끝없는 밤을 지나서
새벽을 건너 아침이 와도 (화면 전환, 이 이후로는 기타 성우나 제작 참여자, 도움을 준 사람들 목록이 나온다.)
그날을 기억할게
행복을 찾아 함께 달려가
꿈꾸는 그곳으로
가파른 언덕을 지나
하늘을 날아 숨이 차올라
주저앉고 싶을 때
내 손을 잡고 다시 일어나
절대 놓지 않을 거야
두렵지 않아
그곳으로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
눈앞에 비친 낯설은 세상
어제와는 다른 오늘
꿈꾸는 그곳으로
음
'꿈꾸는 그곳'이 끝나면 그 다음 곡으로 '마침내 그곳으로'가 연주된다. 제작에 도움을 준 사람들 중엔 도경수의 한국, 일본 팬들이나 크라우드펀딩에 참여한 사람, DMZ 가이드, 이승환, 연상호, 계원예술대학교, 동물보호시민단체 등도 껴있다. 그리고 검은 화면에 흰 글씨로 다시 한 번 제목, 언더독이 나타난다. 그 아래엔 작은 글씨로 '2019년 오돌또기 작품'이 나타난다. 그리고 사라진다. 영화 끝.
영화 곱씹기[편집 | 원본 편집]
으레 《고등학교 문학》이나 《고등학교 독서》에서 말하듯이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해석하는 독자, 정확히는 '독자의 주체성'의 몫이 되지마는, 그래도 해석하는 데는 일단 적어도 '인물, 사건, 배경'은 ― 그리고 '상황, 정서, 태도'도 마찬가지로 ― 파악하고 넘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인물'은 '등장인물 해부'에서, '사건'은 '주요 장면 및 대사 톺아보기'에서, '공간적 배경'은 ''여로와 통시적 고찰'에서 다룬다. 다만, 시간적 배경 등에 대한 설명은 짧으므로 여기서 설명한다.
- 시간적 배경
- 현대(넓게 잡아도 2009년?(빨간 마티즈(3세대)의 최초 출시년도. 파란색 SUV는 차종 불명.) 이후), 가을
- 갈래
- 애니메이션 영화 (2D)
- 제재
- 개(유기견 및 들개)
- 주제
- 자유에 대한 갈망, 동물권
등장인물 해부[편집 | 원본 편집]
해부(解剖)라 함은 원래, 생물체의 일부나 전부를 갈라 헤쳐 그 내부 구조와 각 부분 사이의 관련 및 병인이나 사인 따위를 조사하는 일을 뜻하나, 여기서 파생된 다의어로는 사물의 조리를 자세히 분석하여 연구함이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 해부는 후자를 뜻하며, 초중고 국어 또는 문학 시간에서처럼 그저 얕게만 살펴보는 정도가 아니라 좀 더 깊게 파고들 예정이다. 인물 분석에 해부라는 단어를 쓴 것은 이 때문이다.
유기견[편집 | 원본 편집]
- 뭉치: 사건의 중심
주인공이 아니라 '사건의 중심'이라 일컬은 데는 이유가 있다. 각본가의 의도상, 저들이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되는 모든 개들은 전부 다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즉, '뭉치∈주인공'이라는 명제는 참이지만, '{뭉치}=주인공'?(주인공-{뭉치}={뭉치}-주인공=∅)이라는 명제는 거짓이다. 그렇다면, 뭉치를 무어라 일컬어야 하는가? 곰곰히 생각해 보면, 거의 모든 사건은 뭉치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버려지고, 쫓기고, 염소를 몰고, 피랍에다가, 여정에 투신하고, 사랑에 빠지며, 불리해 보이는 싸움에서 두 번이나 이겨야 했고, 통문을 넘을 때에도 남들보다 더 어렵게 넘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뭉치}=사건의 중심'이라는 명제는 참이다. 초반부의 뭉치는 나약하고 겁쟁이면서도 현실과 자기 자신을 모르는 존재였으나, 봉지의 피랍 이후에는 봉지의 성격을 이어받으면서 그 성격을 더 적극적인 성격으로 만든다.
한편, 뭉치가 일으킨 사건 중 일부는 다른 개들의 삶을 위태롭게 만듦으로써 일부 관객들에게 '암 걸린다'라고 혹평을 받기도 했으나, 다른 면에서는 뭉치가 현실을 어떻게 얼마나 부정하고 싶어 했는지와 현실을 얼마나 모르는지, 저들의 삶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사실주의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 반면에, 뭉치의 정신적 성장은 죽순마냥 꽤 빠르게 자라난다. 나약하고도 현실과 자신을 몰랐던 뭉치가 테니스공을 버림으로써 인간과의 연결고리를 스스로 끊는 데는 영화 시작에서부터 19분 후(작중 시간으로 닷새) 무렵, 삶에 불만을 가지고 산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데가 32분 후(+13분, 작중 시간으로 이틀) 무렵, 협동하여 사냥하는 데 성공하는 데는 58분 후(+26분, 작중 시간으로 사흘+C) 무렵, 사냥개와 1:1로 싸워 이기는 데는(이때는 사냥꾼을 보고 어쩔 수 없이 후퇴) 1시간 7분 후(+9분, 작중 시간으로 하루) 무렵, 밤이와 함께 사냥꾼을 싸워 이기는 데는 1시간 23분 후(+16분, 작중 시간으로 이틀+C) 무렵, 철책을 최종적으로 넘는 건 1시간 35분 후(+12분, 작중 시간으로 하루) 무렵, 작중 시간으로도 겨우 보름 남짓이다. 이는 각본가가 관객과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자유의지?(외부의 제약이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고 어떤 목적을 스스로 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 의지, 또는 외적인 제약이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고 내적 동기나 이상에 따라 어떤 목적을 위한 행동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의지. 후자의 것은 '형이상학적 자유'라고도 한다.)의 실천에 관한 긍정적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함으로 보인다. 사냥개와 사냥꾼과 싸워 이기는 장면에서, 우리는 뭉치가 가진 '힘에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 방울이: 또다른 뭉치, 촉매제 1
뭉치가 자신의 현실을 인식하게 된 계기가 방울이가 버려지는 모습을 목도하게 된 것부터이므로,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현실을 바라본 것과 같다. 즉, 방울이는 나약했던 뭉치의 또다른 모습과 같은 것이다. 또한, 그런 나약한 상태로 계속 있다가는 저렇게 비참히 죽을 것이라는(뭉치가 이를 보고도 여전히 나약한 상태로 있었다면, 마지막에도 저렇게 죽었을 게다.) 뭉치의 말없는 분노를 일으키고 삶다운 삶을 살기 위해 뭉치를 행동하게 한 촉매제이기도 하다.
- 봉지: 촉매제 2
이 개를 보라. 생겨 먹은 것부터가 니체를 닮았다.?(슈나우저와 니체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바로 코언저리에 털을 길게 기르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 다 '선악의 피안'에 있으려 하는 것인지, 슈나우저는 굉장히 지랄맞다.) 뭉치를 본격적으로 행동하게 만든 사건이 봉지의 피랍이다. 봉지는 이전에도 그동안의 삶에 대한 모순에 불만을 가져 왔고 이런 삶에 소극적으로나마 반항적으로 행동했으며, 소설에서는 뭉치에게 자유의지를 일깨워주기도 하였다. 등장하는 비중이 다른 개들에 비해 적지만?(첫 등장이 8분 무렵이고, 마지막 등장이 31분 무렵이다.) 뭉치에게 끼친 영향은 다른 개들보다도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직접행동?(규범이나 제도 따위를 무시하고 곧바로 자기의 의사를 관철하려는 행동)을 보이지 않은 것은 여전히 한계점으로 남아 있다.
- 짱아
처음에는 뭉치에게 '네 주인은 그냥 너여, 너.'라고 말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사람과의 삶에 대한 갈망이 크다. 이는 달수 인형에 대한 애착을 통해서도 보이는데, 달수 인형과의 타의적인 헤어짐과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던 장면을 통해 결국 자기 자신도 뭉치에게 '네 주인은 그냥 너여, 너.'라는 말을 하기에는 다소 내로남불적이었던 것을 (아니면 실천이 부족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뭉치가 그 말을 듣고 합류한 뒤, 뭉치가 서서히 현실을 인식하면서 버려진 개로서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주인으로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짱아의 그 행동은 굳이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 후반부에서 자신이 갈망하던 대로 ― 자신이 선택당하는 게 아닌 자신의 선택대로, 과정이나 결과의 세부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였다는 결과 그 자체에 중점을 두어 ― 살게 된다는 점에서 짱아 역시 주인공 중 하나다.
- 개코
영화에서 직간접적으로 나온 내용으로 쉽게 알 수 있듯이, 개코는 군견 출신으로 개들 가운데 유일하게 DMZ의 존재와 위치를 알고 있다. 또한 집개들 가운데서는 연장자다. 무리에서 짱인 짱아가 공연히 개코에게 '성님'?(강원, 경기, 경상, 전북, 제주, 충청, 함경 사투리로, '형님'을 뜻한다.)이나 '나이 드신 양반'이라고 부른 게 아니다. 뭉치에게는 아저씨뻘이고 ― 뭉치가 '개코 아저씨'라고 부른 데나, 뭉치와 비슷한 나이일 밤이도 개코에게 '아저씨'라고 부르므로 ― 달리 말하면 아버지뻘이다. 그만큼 개코는 군대식으로 행동하는 모습이나 아들뻘 되는 뭉치를 달래는 모습이 자주 관찰된다. 막 현실을 깨닫기 시작한 뭉치에게 같이 가자고 청유하고, 공을 가지러 가는 뭉치에게 안 된다고 외치는 모습, 개인 행동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말과 뭉치를 '신참'이라고 부른 것, 족발 뼈다귀를 먹으라고 챙겨준 것, 갈빗집 아저씨에게 들킨 뭉치를 데리러 숯에 맞으면서도 말없이 달고 간 것, 짱아의 말에 지나는 말로 '옛썰!'이라고 답한 것, 출가하려는 뭉치를 어떻게든 붙잡아 보려고 달래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가하는 뭉치의 의견을 그래도 존중해 주어서 나무라지 않고 가게 둔 것, 사냥개를 무술로 이긴 것, "노견은 죽지 않는다"?(군가에서 유래된, '노병은 죽지 않는다'의 패러디.)라는 대사, DMZ의 앞에 닿아서는 뭉치에게 수고했다면서 격려하는 모습, 홀로 DMZ를 넘지 못한 뭉치를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가라는 조언을 하는 모습, 뭉치의 아이들을 맡아주는 모습 등. 몸에 밴 군생활의 향연은 진하게 풍겨오지만, 개코가 뭉치를 위하는 장면은 물론 그만큼 많이 나오면서도 다만 은근히 챙겨주는 모습으로 나온다.
- 아리, 까리
사실 이 둘은 영화 끝까지 등장함에도 비중이 굉장히 적으며, 게다가 영화의 진행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는 봉지보다도 적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나마 하는 역할은 사냥개 유인하고 잡는 정도인데, 아무래도 소형견의 수(이 둘을 빼면 소형견이나 강아지는 짱아와 토리 뿐이다.)를 맞추려고 넣은 게 아닌가 싶다.
들개[편집 | 원본 편집]
- 밤이
제 어미의 죽음을 목도하고, 여러 해를 철창 안에서 지냈으면서도 처음 밖을 나간 날에 개 공장을 탈출했다는 말을 들으면 '학습된 무기력'이 작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볼 만도 하다. 더욱이, 짖음 방지기를 풀고도 한동안 크게 말하지 못했던 뭉치나 개 공장에서 다른 개들을 꺼낼 때에 다른 개들이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며 어물거린 것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즉, 밤이도 봉지 그 이상으로 삶에 큰 불만을 품고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학습된 무기력이 작용되지 않았던 것과는 별개로, 트라우마는 기억 속 깊은 곳에 남아있어 그것을 쉽게 떨쳐 내지는 못했었다. 그리고 사냥꾼만 만나면 몸이 굳어 버리거나 뒤로 물러섰던 전과는 달리, 뭉치의 '다 잊어 버려'라는 말을 통해 트라우마를 떨쳐내고 사냥꾼의 목을 물어 사과를 받아냈다는 점에서 ― 이 역시 자기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면서도 강자인 사냥꾼에게 덤빔으로써 '힘에의 의지'를 보이고 ― 밤이 또한 뭉치 못지 않게 빠른 정신적 성장을 보이고 있다.
한편, 뭉치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 것은 그만큼 뭉치를 신뢰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지 않고서야 괜히 아프고 쓰라린 데를 어루만지면서 덧낼 일이 있는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염소를 몰아올 때까지 심하게 배척하다시피 했던 것과는 굉장히 대조적이다. 그러니까, 밤이의 성격은 '무심한 듯 시크'가 맞는 것 같다.
- 토리의 어버이
(그야 진한 갈색이나 곤색이 섞인 탓에 물론 믹스견 같다는 느낌은 있지만) 진돗개답게 사납고도 배타적인 성격으로 처음엔 뭉치를 배격했지만, '개 공장에서의 탈출' 이후론, 밤이가 그간 사정을 잘 설명해 주었는진 몰라도 뭉치에게 배타적인 성향은 누그러졌다. 자유롭게 살아남기 위한 토리아빠의 조언을 뭉치가 경청하는 데서, 뭉치가 이들에게 어느 정도 경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토리를 뺀 다른 강아지들을 잃은 부모로서는 좀 특기할 만한 것이, 보통의 이런 부모에게서 전형적으로 보여지는, 살아남은 아이에 대한 지나친 보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지 화목한 가정처럼, 적절한 수준의 사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 토리
역시 마찬가지로 나약했던 뭉치 만큼이나 현실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고 자존망대하다시피 한, 이름 그대로 도토리처럼 까불기 좋아하는 강아지였다. 그러나 자신의 부모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죽은 뒤로는 의기소침하다 못해 자학적으로 보이는 면도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 서서히 극복하며 원래의 활달한 성격을 회복하기도 하고 이전과는 달리 조심성을 갖추며 시나브로 성장해 나아간다. 즉, 늠름히 성장할 잠재성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편집 | 원본 편집]
- 사냥꾼
자연과 동물을 단지 자본으로써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인간 중심적 사고와 자본주의의 타락적 면모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인물이다. 사냥꾼이 저 개들을 미친 듯이 쫓은 이유도, 몸값이 마리당 1000만 원이 넘는다는 '블랙러시안' 종인 밤이를 잡기 위함이었고, 그것을 위해 뭉치에게 위치 추적기를 심어 미끼로 삼기도 한다. 영화 초반에는 개들이 이 사냥꾼에게 쫓기고만 다니었으나(봉지가 사냥꾼을 덮친 예는 제쳐두고), 영화의 진행에 따라 개들이 정신적으로 성장하여, 즉 여태껏 깔리기만 했던 저 언더독(Underdog)들이 사냥꾼을 깔아 버려서 사냥꾼의 목을 물고 낭떠러지로 떨어뜨려 버리는 것과(제가 뒷걸음질 치다가 그런 것이지마는) 지뢰밭 가운데서 지뢰를 밟는 장면을 통해, 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명백한 '권선징악'을 띄게 된다.
- 이효리-이상순 부부
여태껏 나온 인간들과는 굉장히 대조적인 인물이다. 오히려 그래서 작위적으로 보이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장애를 가진 개들을?(어디가 아프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지구는 많이도 아파서 더 마음이 쓰인다고 하고, 달은 한쪽 눈을 잃었으며, 부릉이는 뒷다리가 없다.) 제 자식 키우듯이 하는 것은 그래도 사실적이고 자연스럽다. 처음 보는 들개들, 그것도 대형견 3마리와 소형견 및 강아지 4마리가 같이서 제 앞마당에 나타나도 희한하다면서 성큼 다가선다는 것부터 노래를 부르는 중에 초대하지 않은 멧돼지와 곰까지 제 앞마당에 불러오는 장면은 말 그대로 지나치게 연출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의의는, 작품 안에서는 사람 가운데서도 착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개들이 알게 된다는 것이고(그리고 이는 짱아가 이들 부부를 선택하여 거기에 남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작품 밖에서는 우리가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를 우리에게 (다소 작위적이고 연출적인 장면도 많지만)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 군인들
'노예도덕'의 입장에서라면, 선악 구도가 흑백처럼 딱딱 갈라진 이 영화에서 가장 회색적인 등장인물이다. 말 그대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한편 개들의 '군주도덕'의 입장에서라면, 단지 주동 인물인 저 개들이 남방 한계선을 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당위로 당위를 강요하는 반동 인물, '용'이다. 뭉치와의 추격전은 뭉치가 이 당위의 도전에 도전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고 뭉치에게는 DMZ로 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넘어야 했던 고난이기도 하다. 군인들의 수가 많을수록 뭉치가 넘어야 할 고난의 높이는 높아지고 가팔라진다. 뭉치는 이미 사냥개와 사냥꾼을 이겼지만 여기서는 아직 언더독, 즉 약자의 입장인 것이다. 뭉치가 가진 '힘에의 의지'는 이들의 수와는 상관없이 계속 덤비게 하고, 이들을 넘겨뜨리고 밟게 한다. 이들도 결국엔 뭉치가 계속 성장하게 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조연과 소품의 의의[편집 | 원본 편집]
- 짖음 방지기
짖음 방지기도 레몬 향 등을 이용하는 종류나 기타 여러 종류가 있지마는, 뭉치가 차고 있던 짖음 방지기는 전기충격을 이용하는 것으로 동물학대의 논란이 있는 종류다. 이는 뭉치의 옛 반려자가 동물을 '쾌고 감수 능력'이 있는 개체로 보지 않고 다만 자신의 소유물로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짖음 방지기는 또한 구속의 상징이기도 한다.
- 뭉치의 테니스공, 짱아의 달수 인형
뭉치는, 자신에게서 테니스공을 떼어놓았을 때, 그 공에 집착을 보였다. 처음 공을 놓쳐 사냥꾼에게 쫓기게 될 제도 숨는 것보다 공을 줍는 게 우선이었고, 개코가 공은 내려두고 뼈다귀나 먹으라며 공을 빼앗을 때에도 뭉치는 아쉬움을 보였다. 그러나, 그런 동안에 뭉치는 정신적으로 1mm도 성장하지 못했다. 뭉치가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뭉치가 테니스공을 스스로 버리는 데서부터이다. 또한, 테니스공을 버리는 것은 인간에게의 의지와 연결고리를 끊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는 뭉치가 토리에게 한 "난 이제 사람개 아니야"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런 한편, 짱아는 사람에게 버려졌음에도 그 버린 사람이 준 달수 인형은 꼭 간직하고 있었다. 이럼에도 뭉치에게 "네 주인은 그냥 너여, 너"라고 말한다. 다소 내로남불적이다. 게다가 아지트가 허물어질 때 달수 인형과 타의적으로 헤어진 짱아는 계속 그 전 상황만을 고집하다가도 살아야 하는 방향을 방황한다. 무언가를 떨쳐낼 때에도 타의가 아닌 자의를 갖고 해야 한다는 것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 족발 뼈다귀
도탄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도 상황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이유가 '개들이 사족을 못 쓰는?(무슨 일에 반하거나 혹하여 꼼짝 못 하는) 거'라는 이 족발 뼈다귀다. 족발 뼈다귀는 그 자체로 마취제이고 아편이자,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에게 던져주는 성과급이며, 창조적이지 못한 잠으로, 이들의 '힘에의 의지'를 꺾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퇴폐적인(Décadent) 소품이다.
- 까마귀
까마귀는 관객이 보기에 갑작스럽고도 엉뚱하게 나왔다. 그러나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까마귀가 앉은 곳을 처음부터 비추지 않음으로써, 까마귀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게 해놓았다. 그리고 까마귀가 처음 나오는 장면에 앞서 뭉치가 자신의 공을 버리는 장면을 넣어, 관객들이 이 장면과 까마귀를 연관하도록 한 것이다. 앞서 말한 뭉치의 테니스공이 인간에의 기댐을 뜻하는 것이기에, 이를 버린 행위는 그 의지를 끊겠다는 것이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받아내겠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 까마귀는 뭉치를 첫번째 운명으로 이끈다. 마치 이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려는 듯이, 뭉치는 까마귀를 뒤쫓는다. 그렇게 해서 맞닥뜨린 북한산의 출입금지 구역이 바로 운명을 만나는 자리인 광장인 것이다. (최인훈은 이렇게?(소설 중 대표작인 《광장》의 서에서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시다'라는 말이 나온다.) 말했다.)
- 수류탄
수류탄은 뭉치가 군인들을 협박하는 수단이면서도 최종적으로는 뭉치가 두번째 철책을 넘는 데 도움을 준 소품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 나온 세열수류탄은 그 안의 수많은 금속 조각들이 사방팔방으로 빠르고 멀리 튀기 때문에 상처 하나 나지 않은 뭉치의 모습을 보면 영화의 사실성이 가장 떨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수류탄을 쓰지 말자니 아무리 육식동물인 개더라도 철책을 뛰어넘기엔 순발력과 도움닫기가 부족하다. 제작진들은 마지막까지 시청자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기 위해 뭉치를 추격전으로 몰아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총부리에 옷의 후드가 걸려 아리를 넘어지게 한 후 ― 이는 또한 치와와들이 후드 달린 옷을 입은 채로 나와야 했던 이유가 되어, 아리와 까리의 옷은 '체호프의 총' 규칙을 만족하게 된다 ― 뭉치가 아리에게 되돌아가 아리를 던져 넘기되 정작 자신은 통문을 넘을 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박 일병이 떨어뜨린 수류탄을 뭉치가 주워 추격전이 시작된다. 뭉치가 왜 철책을 따라 달렸는지는 몰라도 이에 다른 군인들까지 뭉치를 쫓아, 뭉치는 혼자서 군인 수십 명을 상대해야만 했다. 뭉치는 그 군인들을 모두 넘어뜨리고 GP 지붕 위에 올라 도움닫기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철책을 넘기 부족했다. 그래서 뭉치가 떨어뜨린 수류탄이 폭발을 일으키며 뭉치를 다시 날린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슬로모션으로 뭉치가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고 "아...! 하아...! 하...! 아...... 아하...! 아하하...! 아하하...! 아하하하하...! 아하...!" 하고 웃으며 흩날리는 샛노란 꽃잎들과 함께 있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마치 《웰컴 투 동막골》의 팝콘 장면을 연상시킨다. 또한, 수류탄과 꽃잎은 제작진들이 이 개들이 자유를 찾아냄을 축하하는 축포의 역할을 한다.
주요 장면 및 대사 톺아보기[편집 | 원본 편집]
- 전체적으로
섬네일|사람은 동물과 위버멘슈 사이에 엮인, 심연 위의 밧줄이자 다리이며, 건너가는 존재이기에 위대하다. 저들도 그러하다.
사람이 보기에 짐승은 하찮고 웃긴 존재일지라도, 위버멘슈에게는 사람도 더 하찮고 더 웃긴 존재다. 그럼에도 사람은 이런 짐승과 위버멘슈 사이에서 '건너가는' 존재이기에 위대하다고 한다. '건너간다'라고 말이다. 이 개들은 DMZ를 넘어간 것보다는 '건너갔다'는 게 더 어울려 보인다. 시시한 월북 농담이나 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사람은 외줄을 타고 건너가는 존재로서 뒤돌아가기에는 위험하고 그러자니 계속 건너는 것도 위험하나 거기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그러니, 나는 위버멘슈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처음 이 비평문을 쓸 때, 소수의견으로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를 언급한 것은 단지 디오게네스, 공자, 피터 싱어 등과 더불어 단지 하나의 의견으로 독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다양한 관점으로의 인식을 유도하게끔 하기 위함이었지만, 쓰다보니 니체와의 접점이 의외로 많이 나와, 결국 부제목으로 니체의 철학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감독과 각본가가 의도했든 안 했든, 어쨌든 니체의 철학과 연관이 너무 깊은 것은 사실임을 밝힌다.
- 뭉치와 반려자의 언어놀이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는 '언어놀이'(Sprachspiel, Language-game)라는 것이 나온다. 언어와 그 언어가 뒤얽혀 있는 행위들로 구성된 총체라는 의미인데, 예컨대 건축 현장에서 누가
벽돌!
이라고 말했을 때, '벽돌'은 그냥 놓여 있는 벽돌을 지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벽돌을 건네 달라는 목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한편, 격파를 보이는 태권도장에서 사범이 훈련생에게벽돌!
이라고 말하는 것은 벽돌을 건네 달라는 것이 아니라 벽돌을 격파하라는 의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각각의 상황에서 '벽돌'이 벽돌이라는 대상을 지시한다는 것만 안다면 각각의 상황 속에서 진행되는 언어놀이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맥락과 규칙을 알고 그에 따른 행위가 전제되어야 언어놀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놀이의 규칙에 관한 오해는 언어유희의 원인으로 쓰이기도 한다.)
아래서 최인훈이 풍문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점을 지적했듯이, 뭉치는 처음엔 반려자가 의도한 대로 '기다려'라는 말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바로 '아직 네 공을 던지지 않았으니 그 공을 물려고 하지 말고 앉아서 가만히 기다리라'이다. 그러나 버려진 후, 자동차를 뒤쫓다 넘어지고 곰곰히 생각한 끝에 그 의미를 '내가 가더라도 그 자리에서 기다리라'라는 의미로 임의로 바꿔 자신의 상황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내면화한다. 이는 뭉치가 얼마나 의지적이고 타율적이며 나약했는지를 보인다.
- 짖음 방지기에다가 짖어대는 개코
개가 짖는 것을 막기 위해, 전기 충격과 '학습된 무기력'을 이용하는 짖음 방지기는, 뭉치에게의 인간의 구속(자유의지를 방해하는 외적 구속과 제약) 가운데 하나를 상징한다. 그렇기에 뭉치는 짖음 방지기를 풀고도 한동안 큰 소리로 말하거나 짖지 못하였다. 이는 조세희의 단편 소설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나왔던, 김영수의 증조부가 노비에서 해방되었음에도 도리어 주인에게 내쫓지 말라고 애원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런데 개코는 이를 밟고 감전되었으면서도, 도리어 짖는 걸 막기 위한 짖음 방지기에다가 짖어댄다. 이는 단순한 개그신(Gag-scene)이 아니다. 짖음 방지기의 본래의 목적이 저들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이러한 구속에 대한 저들의 반항적인 자세를 보인다.
- 봉지는 위로 뛰어넘고, 뭉치는 아래로 기어간다.
(이런 말은 거의 소설에서 많이 한다만) 삶과 자유의지에 대해선 거의 견성한?(모든 망념과 미혹을 버리고 자기 본래의 성품인 자성을 깨달아 아는) 것처럼 말하는 봉지와, 현실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뭉치의 차이가 행동으로 드러나고 있다. 제 앞에 장애물이 있을 제, 그 위로 뛰어넘는 봉지는 장애물을 극복하겠다는 것을 표현하고, 그 아래로 기어가는 뭉치는 단지 순응한다는 것을 표현한다. 게다가 봉지는 처음부터 뭉치를 구하기 위해 사냥꾼을 겁도 없이 덮치지 않았나? 한편, 뭉치의 이런 행동은 여정을 거쳐 사냥꾼에게 다시 쫓길 제, 제 앞을 가로막던 통나무를 (아래로 기어갈 수 있음에도) 위로 뛰어넘어서, 뭉치도 적어도 봉지만큼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 반항적인 봉지와 가자고 외치는 개코
이러고 여기 계속 살 거예요? 이 마을의 버려진 개들은 거의 다 잡혀갔다고요.
봉지는 다른 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에게 버려지고 쫓기면서도 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먹다 버린 쓰레기를 먹을 수밖에 없다는 그동안의 테제에 대한 모순을 인식하고 반항하는 봉지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확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한편 누군가 삶에 불만을 털어놓을 때마다 개코는 짱아에게 '낙원' 가서 살자고 조르다시피 말한다. 봉지도 개코에게 동조한다. 근데, 개코를 보면 누군가 연상되지 않는가? 소설 《오발탄》에 나오는 철호의 어머니 말이다. 철호의 어머니의 '가자'라는 외침은,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자'라는, 다소 추상적인 목적지로의 회귀라는 의미지만, 개코는 '사람 없고 동물들이 살기 좋은 곳이라면 어디든 가자'라는 의미보단 'DMZ 가자'라는 좀 더 구체적인 공간으로의 지향을 드러낸다. 그러나 간 후의 대책이 없다는 점에서만큼은 개코와 철호의 어머니의 닮은 구석이 있다. 어쩌면 저들도 축생으로서 시대와 상황을 잘못 타고난 오발탄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를 극복하다니, 참 대단한 놈들이다.
달리는 건 놀이가 아냐.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달리는 거야.
토리아빠가 뭉치에게 한 말이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사냥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 내용을 일반화시켜 보면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투쟁하는지를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자기도 모르는 새 투쟁을 하게 되고, 투쟁을 하면 거기서 또다른 투쟁에 참전하게 되고, 이것의 무한 반복이다. 자연에서는, 피식자는 살아남기 위해 포식자를 피해 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그 사이에서도 투쟁하며, 포식자는 피식자를 먹어서 살아남기 위해, 또 사냥한 피식자를 더 많이 가지기 위해 포식자들끼리도 투쟁한다. 로트카-볼테라 방정식은 이것을 나타낸다. 피식자가 자기네 개체수를 보전코자 한다면, 이들은 그만큼 자손을 많이 남겨야 한다 ― 마치 물고기처럼. 이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면 미친 듯이 투쟁해서 이겨야 하고, 좀 더 넉넉하게 살고 싶다면 좆빠지게 투쟁해서 이겨야 한다. 이는 단순히 17:1이나 455:1 같은 얘기가 아니다. 심하게는 11월의 미친 계절에, 수십만 명과 동시에 투쟁해야 하는 수도 있다. 저 대사는 자연이 우리에게 얼마나 사이코패스 같은지를 잘 말해준다.
- 봉지의 피랍
짱아가 뭉치에게 개인 행동 하지 말라고 말하는 중에 봉지가 저 먼저 간다며 개인 행동을 한다. 짱아는 모양새 빠진다고 궁시렁대면서도 봉지에게 일찍일찍 다니라고 말한다. 그 말에 봉지는 반쯤 건성으로 '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밤, 봉지는 피랍된다. 그러나 봉지의 피랍은 방울이의 죽음처럼 단순히 개 하나 잃은 정도의 심각한 것이 아니다. 이 동안의 영화 진행의 맥락상, 봉지는 사냥꾼을 수없이 농락하며 족발 뼈다귀 봉지를 물고 왔다. 그랬던 봉지가 피랍되었다는 것은, 다른 개들도 피랍되는 것도 시간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삶의 숨통을 시나브로 조여오는 가운데서도 뭉치는 아직도 현실 인식이 다소 부족하였고('개 보호소'의 실체를 몰랐으므로), 다른 개들은 세상 한탄만 하며 자신에게 깔린 상황을 뜯어고치려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대책없이 가자고만 외치는 개코가 그나마 낫다만 말이다. 그리고 봉지의 피랍은, 결정적으로, 뭉치가 봉지의 성격을 이어받으면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전개시키는 사건이 된다.
여기야말로 답답하고 지겨워요.
개인적으로 더 마음에 드는 대사는
왜 우린 사람한테 버려졌는데, 사람들이 먹다 버린 쓰레기나 얻어 먹어야 되죠? 왜 사람들 쓰레기 더미 속에서 숨어 살아야 하냐고요?
이다만, 주요 대사로서, 이 대사를 선정한 데는 다음 이유가 있다. 첫번째로는 뭉치와 짱아 사이의 불화를 촉발시킨 대사라는 점, 두번째로는 뭉치가 그 동안의 삶,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버려졌는데도 사람들이 먹다 버린 쓰레기나 얻어 먹고 사람들 쓰레기 더미 속에서 숨어 사는 것의 모순을 깨닫고 이에 대한 불만을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표출한 대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뭉치에게 반동적인 짱아의 태도는 오히려 뭉치의 의지와 신념(이라기엔 좀 뭣하다만)을 더 굳세게 만든다. 그렇게 뭉치는이렇게 사느니, 산에 가서 사는 게 나아요!
라고 외친다. 그리고 여기에 짱아가 더 부추김으로써 뭉치는 출가하여 흑염소를 몰고 입산하게 된다.
- 흑염소 농장
- 재미있게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명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자라투스트라의 저 말에서 가축 무리는 민중, 양치기는 지도자, 개는 수호자를 말한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런 자들과 같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몰개성과 억제의 울타리와 올가미를 부숴 다른 이들을 위버멘슈로 건너가게끔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자라투스트라의 진심과는 별개로, 뭉치의 행동이 흑염소 농장의 주인에게는 '약탈자'로 불린다는 점에서 꽤 흥미로운 장면이다.
자라투스트라는 가축 무리를 돌보는
양치기나 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가축 무리 속에서 많은 자들을
끌어내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사람과 가축 무리가 내게 화를 낼 것은 당연하고,
나는 양치기에게 약탈자로 불릴 것이다.―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자라투스트라의 서설 중 9번째 문단 일부
넌 지금 사냥감을 몰고온 게 아니라, 재앙을 몰고온 거야!
토리아빠가 염소를 몰고온 뭉치에게 한 말이다.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산에서의 생활과 인간에게 재물의 의의?(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말했잖나? 인간이란 부모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재물의 상실은 잊지 못한다고.), 그리고 사냥에 대해 무지한 뭉치는 산에는 사람이 오지 않을 거라고만 믿고 들개들에게 사냥 실력만 증명해 보이면 ― 비록 물지는 못 하더라도 ―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토리아빠의 저 대사는 산 속에서의 삶도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뭉치는 처음에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밤이가 토리를 찾아오는 김에 뭉치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말함으로써, 뭉치는 자신의 행동이 가져온 결과에 충격을 느낌은 물론이고 산에서의 삶도 불안정함을 깨닫게 된다. 이 사건으로 삶터가 밀려난 들개들은 다시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떠나야 했고, 비슷한 이상향을 추구한 집개들과 의기투합하게 된다.
같이 허되 따로 사는 삶, 따로 살되 같이 허는 삶. '낙원'을 찾을 때꺼정, 그때까지만 협력허는 거라구... 요.
서로 다른 생활 방식을 갖던 두 무리의 개들이 공동의 이상향을 추구하기 위해 연합하는 과정에서 짱아가 토리아빠에게 한 말이다. 아래서 하근찬이 말했듯이, 집개들은 DMZ의 위치는 알지만 살아남을 기술이 없고, 들개들은 살아남을 기술이 있지만 DMZ의 위치는 모른다. 이 점은 서로 다른 생활 방식을 갖고 서로를 경계하며 반목했던 이들이 서로 도울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는 마치 태평양 전쟁에서 팔을 잃은 아버지와 한국전쟁에서 다리를 잃은 아들의 이야기인 《수난이대》를 연상시킨다. 거기서도 한 팔만 가진 아버지 만도가 고등어를 든 채 오줌을 싸려 하자 아들 진수가 고등어를 대신 들어주고, 외나무다릴 건널 땐 만도가 진수를 업고 건너기 시작하는 걸로 끝난다. 하근찬은 《수난이대》를 열린 결말로 내놓았지만, 이 작품은 서로 도운 끝에 사냥꾼을 이겨내고 DMZ에 닿는 것으로 끝난다는 게 차이점이다. 근데, 하근찬은 《수난이대》를 쓰면서 부자가 강물에 빠지는 걸로 끝낼지, 무사히 건너는 걸로 끝낼지를 고민했었다고 한다. 그럼 만약에, 언더독이 DMZ를 채 가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결말이었다면, 우리는 이 영화에서 어떤 주제를 얻어내야 할까? 당장에 떠오르는 것이라도 적자면, 2012년의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인 《파닥파닥》이나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가 먼저 떠오른다. 그렇다면 하이 리스크를 감안해서라도 끊임없이 탐구하고 도전하고 부딪치는 삶의 가치를 전해줬을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잖나?
쉽게 말해서 진퇴양난, 진퇴유곡, 진퇴무로.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온' 이들이 '황천강'을 앞에 두고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선' 모습이다. 그러나 이들은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하고 고민하지 않는다. 토리아빠는 이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4차선에 뛰어든다.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상황에 스스로 내모는 것이다. 뭉치와 밤이도 이렇게 도로에 나선다. 스스로를 극단으로 내모는 것은 물론 당연히 무모한 일이다. 저건 단순한 도박이 아니다. 러시안 룰렛이다. 그렇게 죽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들은 충격이라도 덜 받으려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다. 어쩌면 헤드라이트의 강한 빛에 몸이 굳었을 탓도 고려해 볼 만하다. 방법이야 어쨌든, 적어도 저들만큼은 스스로 초극(超克)했다고 일컬을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초극한 이들은 다른 개들이 길을 건너도록 돕는 역할도 맡는다.
한편, 이 부분을 해부하는 데 이육사의 《절정》을 좀 많이 인용했다만, 이들의 상황과 《절정》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절구(絶句)의 한시(漢詩)가 으레 그렇듯이 《절정》의 기와 승, 즉 1연과 2연에는 상황이 주어지기에 여기까진 다름이 없다. 그러나, 감상과 태도가 드러나는 《절정》의 3연에서 화자는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하고 고민한다. 여기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현실에의 굴복이 아니라 초인에게의?(다들 이렇게 해석한다만, '초인'이 위버멘슈를 뜻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의지를 뜻한다. 이는, 스스로를 구원하는 건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 개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다. 또한 4연의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를 보면 말이다. 무지개가 시적 화자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지개가 갖고 있는 허무성, 즉 비온 뒤 하늘이 개고 나서 생기는 무지개는 아름답지만 잡으려 노력해도 잡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재하는 DMZ와는 대조적이다. 다만, 시적 화자는 강철 무지개의 아름다움과 단단함으로 매운 겨울을 이겨내려고 한다. 시적 화자의 이 태도는 이 영화의 개들과 지향하는 바가 같다고 볼 수 있다.
넌 바보! 똥꾸! 멍충이야!
딱 어린애가 할 법한 욕설(?)로 ― 그 왜, 지금 들으면 귀엽다는 생각밖엔 안 들지마는, '빵꾸똥꾸'라든가 '해삼멍게말미잘' 같은 거 있잖나 ― 표면적으로는 토리가 자신의 발을 벗어나려는 개미에게 하는 말이지만, 토리의 심리에 비추어 보면 이는 토리가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자존망대하여 까불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토리가 멋모르고 도로에 나섰다가 일어난 사고로 부모를 잃게 되자, 이에 대해 자책성으로 나온 말이다. 그러나 그 정도가 자책(自責)을 넘어 자학(自虐)에 가깝기에, 토리의 보호자가 된 밤이가 그러지 말라고 다가오면서 그러면 엄마아빠가 슬퍼할 거라고 말한다. 토리는 참았던 눈물을 쏟으면서 밤이에게 안긴다. 토리는 울고도 한동안 의기소침해 있었으나, 고라니 사냥 이후로는 원래의 성격을 회복하면서도 조심성을 갖춘다. 그래서, 나중에 토리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에 나서기보다 밤이의 곁으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
- 고라니 사냥
관객들 사이에서 많이 아쉬워했던 부분이다. 사람에게 쫓겨나는 개들이 왜 저들보다 약자인 고라니를 사냥하느냐며 이는 내로남불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한편, 이 주장에는 단어 해석에 대한 오류가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개를 버리고 쫓는 행위와 개가 사냥을 하는 것을 '욕망'이라는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다. 그러나 이들이 사냥을 하는 주된 목적은 '의식주' 가운데서도 '식'을 만족시키기 위함이다 ― 한편, 이들에겐 '의'는 불필요하며, '주'는 최후에 만족하게 된다. '욕망'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또 '탐하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탐하다'의 사전적 정의에는 '지나치게 욕심을 내다'라는 부분이 나온다. 사람이 의식주를 적절히 충족한대서 이를 나무랄 이는 없다. 그러나 사치스러운 옷을 여러 벌 두거나 폭식을 한다거나 음식을 버린다거나 부동산 투기를 한다면 이는 탐욕, 즉 욕망이 되므로 나무랄 게 된다. 그런데 저들은 고라니를 단 한 마리만 잡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걸 갖고 저들은 배불리 먹었다. 이들의 행동엔 '욕망'보다는 '욕구'가 더 적절하다.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욕구'의 '구'는 '구하다'라는 뜻으로서 이는 또 '필요한 것을 찾아내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욕구와 욕망의 차이는 필요와 불필요의 차이다. 또한, 저들에게 삶의 의미는 저들을 억압하는 것과 약육강식의 논리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기 위해 ― 비록 현실도피적이라고 보일 수는 있어도 ― 떠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저 장면은 문제가 없고 오히려 이야기의 진행에 필요한 장면이다. 사냥을 한다는 것은, '아동소설판 서문'에도 나왔다시피, 곧 스스로 먹잇감을 찾아내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내고 자립하는 과정 중 하나이기도 하다.
- 사냥개들과의 싸움
주동 인물인 이 개들과 반동 인물 가운데 하나인 사냥개들은 모두 같은 개지만, 그 성향은 ― 뭉치의 짧은 연설에서 나왔듯이 ― 전혀 다르다. 저들은 이미 정착하기 시작한 이들과는 달리 그곳의 지리를 모르고 무엇보다도 자유의지가 없다. 한편 '피할 수 없다면, 싸워야죠'라는 뭉치의 말에서는 뭉치의 운명관인, 아모르 파티를?(Amor fati, 운명의 사랑) 엿볼 수 있다. 이들 일곱 마리의 개들은 네 마리의 사냥개들과 싸운다. 그 가운데서 중형/대형견인 뭉치, 밤이, 개코는 1:1로 맞붙어 싸우고 소형견과 강아지인 짱아, 아리, 까리, 토리는 넷이 뭉쳐서 사냥개 한 마리를 당해 낸다. 이 가운데서 가장 눈여겨 볼 장면은 뭉치와 사냥개의 1:1 싸움이다. 뭉치는 밤이처럼 제 체격보다 큰 동물의 사냥에 익숙한 것도 아니고, 개코처럼 군생활을 치른 것도 아니며, 소형견들처럼 몰매를 놓은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뭉치는 처음에 몇 번 얻어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뭉치는 계속 일어서면서 호탕히 웃었다. 이는 보통 사람이 할 만한 대처가 아니다만, 뭉치가 미쳐서 이러는 것도 아니고 그걸 당해 낼 힘이 있다고 확신해서도 아니다. 말 그대로, 뭉치는 운명을 사랑한 것이다. 그 웃음의 의미는 뭉치가 운명에게 '일로 와, 일로 와, 이 개새끼야'라고 오히려 파격적으로 사랑 고백하는 면에 가깝다. 그렇게 우직하게 달려드는 운명, 아니, 사냥개를 피하고 뒷발로 차 넘어뜨리기도 하고 박치기로 턱을 날린다거나 나무를 밟고 도약하여 낙차로 사냥개를 깔아뭉갰다. 그리고 두 발로 서서 사냥개를 힘으로 밀어 넘어뜨리는 장면은 언더독과 오버독의 위치 반전, 즉 언더독의 반란을 뜻한다. 또한, 역경과 고난의 극복을 뜻하기도 한다. 앞뒤로도 온갖 역경과 고난이 있지만 이들은 그걸 모조리 극복해 버린다. 불교로 치자면 온갖 허무를 극복해 버리고 허무의 산 꼭대기 위에 앉아 있는 부처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어서들 가요. 물가를 따라가면, 안전해요.
뭉치가 불 속에서의 탈출 후에 말한 말이다. 사냥꾼이 마구잡이로 총을 쏜 데서 튄 불똥이 갈밭을 태우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탈출하는 과정보다는 탈출한 후다. 탈출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목숨이 달린 일이기에 살아남기 위해 달리고 달린 장면 뿐이다. 그러나 갈밭이 불탄 후에 뭉치는, 화재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갈밭을 떠나 계속 이동하자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사냥꾼에게 서식지를 노출당한 이상 그곳에서도 더 이상 안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그곳을 '낙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저들에게는 아쉬우면서도 다소 충격적인 일이었겠지만, 이 사건으로 그곳이 사람이 없는 완전한 '낙원'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나 뭉치는 오히려 이 사건을 '창조적 파괴'?(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낡은 것을 파괴하는 것, 자본가가 이윤을 창출하는 방법 중 하나다. 조지프 슘페터가 경영학에서 내세운 용어이나, 내용이 적절하기에 인용함.)나 '영원 회귀'처럼 여겨 계속 이동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옳은 판단은 이들이 정말로 그리던 '낙원'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 이효리-이상순 부부와의 만남
민통선 내로 추정되는 곳에다가 나무집을 지어 장애견들과 같이 사는 이 부부들은, 일곱 마리의 들개들이 제 집 앞마당에 나타나도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신기해 하고 겁없이 성큼 다가가기도 한다. 물론 이 행동은 연출적이다. 그러나 이 부부의 등장이 작품 내외적으로 주는 영향은, 첫째로는 밤이가 수 해 동안의 귀납 추론으로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우리(개)들을 못 살게 군다'라는 결론을 무너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밤이가 뭉치에게 먼저
(덫에 걸린 뭉치의 다리를) 그 사람들한테 보이면 어떨까?
하고 제안하는 데서 그 귀납 추론의 결론이 무너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작품 외적으로는 사람과 자연의 올바른 관계를 시청자에게 제시함으로써 사람과 자연의 화해와 관계 개선에 참여하길 바람을 드러낸다. 한편, 이 개들 가운데 짱아를 뺀 나머지는 이들과 만난 후에도 저희들은 계속 가겠다고 말하는데, 이 또한 작품성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만약 저들이 DMZ를 가지 않고 전부 다 거기에 눌러살게 되었다고 하면, 처음에 DMZ로 가겠다고 한 의지의 의의와 작품의 주제 의식과 DMZ의 존재 자체는 무어가 되냐며 무진장 욕먹었을 것이다.
나는 갈 거예요. 나도... 내가 생각한 대로 살고 싶어요.
사람에게 선택되는 것이 아닌, 사람을 선택한 짱아를 두고서 뭉치가 한 말이다. 이에 앞서 짱아가 말한
나가 인간을 선택한 것이여.
와 함께 '스스로 사유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삶'이라는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대사이다. 한편, 짱아는 출가하는 뭉치에게사는 대로 생각하면 되는 거여! 지가 뭐라구 생각한 대로 살겠다구 난리여, 난리가.
라고 했던 전과 달리 짱아도 실존적 자각을 깨닫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된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은 굉장히 큰 차이다. 일단 살아 움직이지만 테트로도톡신에 전두엽이 죽어 자발적인 생각을 할 수 없어 강제 노역에 끌려가는 이를, 우리는 좀비라고 부른다. 또한 주체성없이 기계적으로 행동하고 처세술과 아첨을 통해 무사안일주의로 살아가는 소시민들을, 우리는 좀비족이라고 부른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일인가? 생각없이 사는 것이야 말로 좀비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모두 어렸을 적에 어떻게 살고 싶다고 그리며 살아왔다. 우리는 이 황금같은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을 존경했다. 그러나 우리를 포함한 대다수가 그것을 잊어 버렸다. 모두가 자유와 해방을 그 무엇보다도 애틋하고 간절히 불러야 하는 때가 온다면, 일단 저들처럼 일어서고 보는 것이다. 광장을 나서다가 두려워 밀실로 물러날지라도. 이 위대한 시도의 시작조차도 그만큼 존경받을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로와 통시적 고찰[편집 | 원본 편집]
일단, 이들이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더 성장한다는 점을 먼저 짚고 넘어가자. 또한, 한국 전도가 있다면 ― 이왕이면 도로까지 표시되는 것이 가장 좋다. ― 당장 그걸 펼치고 펜도 하나 준비해라. 없다면 중부지방을 모두 볼 수 있는 것으로 하나 준비해라. 왜냐면 이들의 여로가 굉장히 구불구불하기 때문이다.
- 서울 북부 (강북구 우이동?)-북한산 (강북구 우이동?-양주시 장흥면 인근)
북한산은 수도권의 버려진 개들이 사람에 의해 모이는 곳이자 사람에게 또 다시 쫓겨나는 곳이다. 마치 보호 구역으로 쫓겨나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우처럼 말이다. 어려서부터 반려자들에게 자라나 그네만 보고 살아왔던 개들이, 부르주아에게 헌 신 짝처럼 버려져 실업자가 된 노동자처럼, 하루아침에 버려지는 공간이다. 여기에 버려진 개들은 자신에게 갑작스러이 다가온 현실과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피하려고만 한다. '뭉치와 반려자의 언어놀이'와 '족발 뼈다귀'에서 보였듯이, 뭉치는 '기다려'의 의미를 임의로 바꾸어 그것을 내면화하고 정당화했으며, 반쯤 무너진 집에서 노심초사하고 살면서도 살점도 겨우 있을락 말락 하는 족발 뼈다귀에 사족을 못 쓰는 채로 며칠을 지낸 것이 그 예시다. 이런 이들이 드디어 떠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때는, 여러 모로 박정한 사람들에 의해 먹을 것과 살 곳을 빼앗기고 생존에 위협받기 시작한 때다.
- 북한산-경기 북부 (연포천?(연천군과 포천시)?)-자유로 (파주시 문산읍 내포리)
북한산에서 자유로까지 가는 동안에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묵묵하되 활기차게 걷고, 비가 올 때면 지붕 아래서 임시로 피하고, 그 뿐이다. 이들의 대화는 주로 '낙원'에 닿았을 때의 삶을 그리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하늘에 별을 수놓는 것이다. 각자 자신이 바라는 대로 삶을 설계하는 것 말이다. 자유로 앞에서는 고속으로 달리는 차로 진퇴양난에 놓인다. 그러나 무릇 위버멘슈는 마태오 복음서 4장 1절에서 10절까지에 나오듯이, 유혹자(사탄)의 유혹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유혹자를 유혹한다. 그렇기에 이들은 차도에 나선 것이다. 비록 여기서 개 두 마리가 죽었지만,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의 '자라투스트라의 서설'의 줄광대가 떨어져 죽을 적에도 자라투스트라가
너는 네 천직(天職)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니 그 누구도 너를 비난할 수 없다. 내가 너를 묻어주겠다.
라고 말한 것처럼, 저들의 죽음이 헛되고 헛되어 헛되고 헛되니 헛된 것이?(전도서 1장 2절, 12장 8절 참고. 전도서(코헬렛)는 모든 구절이 '허무하다', '헛되다', '소용없다'라고 투덜대는 것 뿐이다. 얼마나 투덜대었는지, 각 장마다 저런 단어가 적어도 다섯 개는 나온다. 솔로몬이 썼다면서 이런 수동적이고 나약한 말만 늘어놓을 뿐인가?) 아니다. 하나 덧붙이자면,미(美)는 이별(離別)의 창조(創造)입니다.
- 임진강 (파주시 문산읍 내포리)
임진강은 이들이 낙원으로 오해했던 공간이지마는 이들의 힘(Macht)을 확인할 수도 있었던 공간이다. 집개들에게는 처음으로 자신의 먹을 것을 직접 구한, 창조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이들이 이 경험에서 얻은 고라니 고기의 맛은, '이효리-이상순 부부'와 만난 후에도 '낙원'으로 떠나고 싶어 하게 하는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사냥개들과의 싸움에서도 이들이 '힘에의 의지'로 자신들보다 더 강한 사냥개들을 넘어선 것을 보였다. 비록 '사냥꾼'을 보고 후퇴하기는 했지만, 서울에 있었을 적에 비해 이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 강원 영서 북부 (화천군 간동면 간동1리-철원군?)
이들은 철원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경원선(京元線, 서울-원산) 구간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민통선(?)을 넘었다. 그리고 이 민통선 지역에 사는 '이효리-이상순 부부'는 이 개들이 쉬어갈 수 있게 하는 사람들이면서도 이들이 그간 갖고 있었던 귀납 추론의 결론, '사람들은 나쁘다'에 대한 반례이다. 이들은 부부가 내어준 사료를 먹으면서도 고기의 맛을 그린다. 이는 이들이 계속 '낙원'을 가려고 하는 이유이다. 한편, '사냥꾼' 또한 이들을 쫓아 여기까지 온다. 민통선 안은 단순 호기심 따위 핑계로 출입시켜주는 곳이 아닌데다가 총기를 소유하고 있는 사냥꾼의 출입을 쉬이 허락해 주지 않을 뿐더러 내비게이션이 정상 작동하는 모습에서, 개들은 어쩌다가 다시 민통선 밖으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뭉치'와 '밤이'는 여기서 마지막으로 사냥꾼을 만난다. 그러나 이들은 임진강에서와는 달리 물러서지 않는다. 이들은 각각 철사 덫에 걸리고 절창을 입었으나 사냥꾼의 단도가 나뭇가지에 박혀 당황한 틈을 타 협공으로 사냥꾼을 이긴다. 1920년대 한국 신경향파 문학과 비슷한 구조이지만도 다른 점은 이들이 사냥꾼을 직접 죽이지 않고 사죄와 항복만 받아내고 조소하는 선에서 끝낸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냥꾼은 지뢰를 밟는 것을 마지막으로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한편, 개들은 사냥꾼을 이겨서, 거의 성숙해졌다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완전히 성숙한 열매를 남에게 맛보이려 하지 말라고 했지마는?(과수원에서 약간 덜 성숙한 놈은 내다 팔고, 완전히 성숙한 것은 저희들이 먹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완전히 성숙한 열매는 유통과정에서 물러져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들은 창공에 로프를 아직 충분히 높이 던지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별을 향해서, 어제도 오늘도 로프를 매고 하늘 끝까지 높이 던지려고 시도했을 뿐이다.?(요들 《푸른 창공에 로프를 던져라》에서 인용) 그렇기에, 이들은 '완전히' 성숙해지지 않았다. 단지, '거의' 성숙했을 뿐이다.
- 비무장지대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 인근)
'개코'가 말한 '낙원'이 바로 여기다. 이들이 비무장지대로 가기 위해 통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게릴라식으로 달려드나, 이런저런 일 끝에 '뭉치'는 넘어오지 못한다. 게다가 뭉치가 수류탄을 갖고 협박을 하고는 갑자기 철책을 따라 서쪽으로 내달리자 쫓아오는 군인들의 수는 점점 불어난다. 처음에 6명이었던 군인들이 11명이 되고 14명이 되고 18명이 되고 19명이 되었다가 소대 하나 정도 규모는 되는, 35명?(직접 셌다.)을 넘어야만 뭉치는 DMZ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걸 뭉치가 해낸다. 처음에 10명을 넘어뜨리고?(넘어뜨리지 않고 통과한 군인도 꽤 많으나 기준이 모호해서 안 셌다.) 다시 뛰어서 더 쏟아져 나오는 군인들?(컷이 바뀌기 전에 나타난 군인만 27명이다. 직접 셌다.)도 2명을 넘어뜨리고 11명의 하이바?(직접 셌다.)를 밟아 GP 지붕 위로 올라가 도약하고, 때마침 놓쳤던 수류탄이 터지면서 뭉치가 DMZ로 넘어가게 한다. 이로써 뭉치는 완전히 성숙해졌다.
주제선율, 고정악상, 유도동기[편집 | 원본 편집]
- C↗D↗E→E→E↗F↘E↘D↘C
- '개들의 여정 I'(으뜸음 G)을 시작으로, '개들의 여정 II'(으뜸음 C), '꿈꾸는 그곳'(으뜸음 G#)에 쓰인, 장조에 상승하는 (또한 이 선율은 2번 반복되면서 으뜸음이 장3도로 상승한다.) 선율은 말 그대로 '개들의 여정'을 나타내고 개들의 낙관적인 전망을 표현하고 있으며, 영화가 끝난 후에도 흘러나온다는 점에서 복선이 될 수도 있다.
- F#↗A↘G#↘E↗F#↘D↗E↘B↗D
- 이 영화에서는 '개들의 여정 II' 한 번만 등장하는 선율이지만, 이 전에 만들어진 '마당을 나온 암탉'의 '양계장 풍경'에서도 쓰인 선율이다. 그리고 이 선율이 흘러나올 때, 각 영화에서는 '마당'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모습이 비친다. 두 영화의 작곡가도 같으므로 이 선율은 작곡가 이지수의 '평화로운 마당의 유도동기'로 볼 수도 있겠다.
- A↘E↗G↘D↗G↗B↗D↘C↘B→B↘A
- 이 선율은 영화 전체에 걸쳐 여러 악기, 여러 조성, 여러 셈여림, 여러 빠르기로 여러 분위기를 뒷받침하는 데 쓰인다. 으뜸음이 E에 단조인 이 선율('버려진 개'와 '자유로 사고'의 경우) 외에도 F('뭉치의 결심'의 경우), D#('마침내 그곳으로'의 경우), F#(또 한 번 '뭉치의 결심'의 경우), G('사냥꾼의 추격'의 경우), A('DMZ를 넘어'의 경우) 등이 있다. 때로는 등장인물이 그 자체로 처한 '절망'의 상황을, 한편으로는 '도약', '도전'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렇듯, 일정한 유도조건 없이 자주 반복되는 선율이므로 유도동기랄 수는 없고 그냥 이 영화의 주제선율이다.
- F↘E↘D↗E↗F↗G↘E↘C↗D 또는 F↘E↗G↘F↘E↗G↘F
- 앞서 언급한 'A↘E↗G↘D↗G↗B↗D↘C↘B→B↘A' 선율이 나올 때, 간혹 뒤에 나오는 선율이다. 이를 구별하여 쓸까 하다가 결국 구별키로 했다. 왜냐하면, 이 선율은 앞 선율과는 달리 암시하는 주제, '극복'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나며, 이 뒤에는 단조인 앞 선율에서 장조로 바뀌기 때문이다. '뭉치의 결심'에서는 마침내 '인간과의 연결고리'에 대한 표상인 '공'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인간과의 연결고리를 끊은 나는 스스로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왜냐하면, 신은 죽었기 때문이다!)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까마귀를 쫓아갈 때 나왔고, '자유로 사고'에서는 밤이가 토리의 어버이를 추모할 때 나왔으며?(이 유도동기는 고인에 대한 슬픔의 극복을 암시한다.), '사냥꾼의 추격'에서는 덫에 걸렸던 뭉치가 그걸 끊고서 사냥꾼을 저지함으로서 밤이와 함께 협공하여 사냥꾼을 이기게 되는 장면이 나오고, 'DMZ를 넘어'에서는 뭉치가 철책을 넘기 직전, 도움닫기를 할 때 나온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 비평문을 쓰면서
나는 이 영화를 2021년 9월 12일에, 1000원에 구매해서 거의 예순 날에서 일흔 날 정도까지, 하루에 한 번, 아니면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주요 장면들만이라도 계속 돌려 보았다. (믿기질 않는가? 사실 나 또한 니체가 《카르멘》을 스무 번이나 감상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단순히 하루에 1회라고 계산하더라도 구매일에서 일흔 날은 훌쩍 되었으니 나는 이 영화를 한 번 볼 때마다 겨우 15원도 안 되는 값을 치른 것이다. 이렇게 저평가되어 있을 수가! 내가 이렇게 자주 돌려 본 데는 비평을 위해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보고자 한 것도 있지만(그만큼 새로운 걸 찾아낸다. 계속 뭔가가 추가되고 갱신되는 이 문서처럼.), 이만큼 내게 큰 의미를 주는 영화가 내게는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이 영화를 깊게 고찰하며 비평문을 쓰는 데서 내 사고를 바꾸는 데도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대로 인용하면서 서로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의견을 듣고 인용한 데서도 깊은 깨달음을 느꼈다.
- 주제, 등장인물 1, 내용 1
이 영화는 겉에서는 동물권에 대해 역설(力說)하고 있지만 내가 아래서 인용한 '신좌파의 반박'이 모두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점이 있다. '아동소설판 서문'에서, 선택과 자유, 스스로, 생각 같은 단어는 자주 나오지만, 동물권에 관한 내용은, 넓게 쳐도 '버려진 개'만 빼면 등장하지 않는다. 처음에 뭉치는 괜한 길고양이에게 얻어맞거나 천둥번개와 닭 인형에도 놀랄 정도로 겁많고 나약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모르는 존재였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고 결심을 내린 후부터는, 스스로의 의사를 갖고 행동하며, 마취총을 대신 맞아주거나 그 상태에서 사냥개 세 마리와 대치하고, 달리는 차 앞에서 떡 버틴다거나, 사냥개와 싸워 이기며, 마침내 밤이와 함께 사냥꾼을 넘어뜨리고 비굴한 사과를 받아내는 데까지, 아주 빠른 성장을 보인다. 즉,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 보면, 동물권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비참한 자들이 운명과 억압과 역경을 이기는 과정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분단의 여러 상징(자유로, 끊긴 철도, 지뢰밭, 대성동, 남방한계선 등)을 보인 끝에 저들이 DMZ라는 중립지대로 투신하는 것을 보이면서, 당시 만연했던 남북통일의 낙관적 전망도 보이고 있다.
- 내용 2, 형식 1
토리아빠가 뭉치에게 말했던 '살아남기 위해 달린다'라는 말은, 처음엔 그냥 흘려 듣다시피 했던 말이다. 토리아빠가 이 말을 하게 한 뭉치의 말, '산에서 마음껏 달려 보고 싶었다'라는 말은 그저 공연한 의심을 피하기 위한 핑계였을 뿐이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여러 번 돌려 보다가 뭉치가 DMZ를 넘기 위해 달린 데서 토리아빠의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작중 그 누구라도 달리지 않았더라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봉지도 달렸으나 활로가 막혀 달릴 수 없게 되자 피랍되었고, 밤이도 마취총에서와 사냥개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가파른 바위를 달려 올라야 했고, 불타는 갈밭에서 강가로 몸을 피하기 위해 원심분리를 겪고 이리저리 튀어오르며 빠르게 구르는 드럼통 위에 올라타면서도 달려야 했으며, 뭉치는 총을 들고서는 찦차를 타고 쫓아오는 사냥꾼을 따돌리기 위해서 또 달려야 했고, 마침내 저들은 통문을 넘기 위해서도 기습적으로 달려야만 했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을 달린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DMZ로 가기 전까지는 제대로 달려 본 적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저들은 그동안 한평생이 아닌 하루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잠꼬대처럼 발버둥을 쳤던 것이었다. 가만히 있으려면 어찌 됐든 간에 움직여야 하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쉴 새 없이 달려야 한다. 저들과 우리는 모두 붉은 여왕의 나라?(루이스 캐럴의 소설이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후속작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 가운데서,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는 가만히 있으려면 움직여야 하고, 움직이려면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이 점에서 나온 진화학, 경영학 용어가 '붉은 여왕 가설'이다. 어떤 로트카-볼테라 방정식에서 어떤 구간의 시간에 따른 포식자 수나 피식자 수의 모든 미분 계수가 0이 되는 구간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포식자나 피식자 둘 중 적어도 하나가 절멸했다는 얘기 밖에 더 되지 않는다.)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잔인한 세상에 대한 어둡고도 사실적인 묘사에 다시 한 번 제작진들에게 감탄을 보낸다.
- 형식 2, 전개 1
윗문단에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어린이도 볼 수 있게 만들어졌지만 영화의 초반부('자유로 사고'까지)는 사실주의를 잘 설명하고 있는 편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작위적이고 떨어지는 사실성이나,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이동 경로?(정보가 확실한 것만 적자면, 북한산('개 버리기 딱 좋은 포인트', 재개발지역, 북한산의 들개들을 가리키는 표현인 '산의 무법자', 양주시임을 드러내는 표지판) - 연천군 노곡리 혹은 포천시 노곡리(어쨌든 경기도 최북단 지역) - 자유로의 파주시 구간(연천, 포천의 서남쪽) - 임진강(자유로 너머의 강) - 화천(사냥꾼의 GPS 추적기의 정보, 임진강의 지류가 없음) - 파주시 대성동(민통선 내의 높은 깃대), 생각해보면 한국 분단의 상징물들을 보이기 위한 것일는지도 모른다.)(즉, 개연성의 문제로 볼 수 있으나 작중에서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 일단 넘긴다.)에 대해선 물론 비판해야겠지만. 한편, 아래서 횡보가 남긴 평가에서처럼 '왜'라고 물어보고는 그 답을 관객들에게 미뤄 버리는 점도 아쉬웠다. 어쩌면 그들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기에 그랬을 점도 있고, 사냥꾼의 언행을 통해 모든 것은 결국엔 다 돈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고 보았을는지, 관객에게 그 원인을 정말로 고려해 보라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 전개 2, 등장인물 2
게다가, 뭉치와 밤이의 관계의 전개가 다소 이상스러웠다는 것도 매우 아쉬웠다. 뭉치는 왜 밤이에게 첫눈에 반했는가? 이건 마치 "쳐움부터 머찐 카리쓰마를 보여쥰 밤이..~! 그뇬은 머시써따~! 어떻해`!~!~!~!////// 밤이한테 뻑가따~!" 같잖나. 또한, 밤이가 뭉치에게 무심한 듯 시크하게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설명할, 거의 유일한 관점은 서로가 서로를 구해준 데서 온 고마움의 발전이, 사랑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객 입장에서는 뭔가 세부적인 맥락을 말하지 않으니 허전하고 이상할 뿐이다.
- 혹평에 대해서
혹자는 이런 평가를 한다. '개가 말을 하는 데서부터 흥미가 깨졌다.', '결국 참신함 없이 이전에 남이 했던 말을 또 반복한다.', '대사에 메시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영화에 남북 관계 같은 정치적 사안이 왜 들어가는지 알 수 없다.' 등. 첫번째와 네번째 것은 어느 일본인이 내린 ― 그 사람은 10점 만점에 1점을 주었는데 ― 평가에서 발췌했고, 다른 두 개는 어느 한국인이 내린 평가다. 다들 틀린 말은 아니다. 아래서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했듯이, 인간이 아닌 것들의 행동을 인간의 입장에서 끼워맞추는 것은 '종족의 우상'이다. 또한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런대서, 그것이 평가를 박하게 해야 만하는 요소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렇잖으면 이야기 자체가 전개가 되지 않는다. 자연보호의 주제를 담은 《모노노케 히메》(a.k.a. 원령공주)나, 그저 오락성만 가진 《101마리 달마시안》, 《레이디와 트램프》, 아니면 《라이온 킹》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영화들이 이 점 때문에 감점되어야 하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또한, 했던 말을 또 반복한다는 점도 말이다. 참신함? 좋다. 그러나, 대부분의 참신함은 결국 이전에 있었던 것에서 영감을 받거나 필요에 따라 생겨난다. 때문에 문학이든 철학이든 각자가 말하는 주제는 서로가 서로를 부분적으로 포함하는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장용학?(관념적 어휘와 한자어를 자주 쓰는 것으로 유명한 소설가. 주요 작품인 《요한 시집》은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에서 영향을 받았다.)이 장 폴 사르트르?(문학가이고, 실존주의 철학자이면서도 유물론을 중시하는 공산당원. 주요 작품에 《구토》 따위가 있다.)의 영향을 받았대서 《요한 시집》이 같은 이유로 혹평을 받았던가? 김만중이 삼국유사 속 조신설화에서 전개와 교훈을 그대로 가져왔대서 《구운몽》이 같은 이유로 혹평을 받았던가? 진리의 절대성을 지지한 철학자들은 전부 플라톤의 앵무새고, 이를 부정한 철학자들은 전부 프로타고라스?(진리란 상대적이라서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한 소피스트)의 앵무새던가?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가 서로 정반대의 이야기를 주장하면서도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로 분류되는 것도 실존과 자아의 탐색에 관한 연구 때문인 것처럼, 겉으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내용도 그 속을 뜯어보면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대사에 메시지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것. 옳다. 너무 노골적인 건 사실이고, 설교조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 대사가 작품 전체의 주제를 직설적으로 관통한대서 왜 그것이 까여야 하는가? 소설가 장정일?(소설가 겸 시인. 작품에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켜고 끌 수 있다면》, 《햄버거에 대한 명상》,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따위가 있다.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인해, 《즐거운 사라》를 쓴 마광수와 같이 음화반포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한편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영화로 만든, 장선우 감독의 ― 《나쁜 영화》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으로 유명한 영화감독의 ― 《거짓말》은 무죄로 판결났다.)은 영화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에 인터뷰로 출연하여 (문학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운 적 없는) 전위 예술가, 권용만의 시와 가사를 읽고, 그것들의 좋고 나쁨과는 별개로 시원하게 폭로하고 냉소하는 내용에 대해, 현 시대의 다른 전위 시인들과 비교하며 그 점을 눈여겨 보았다. 한편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가 ― 물론 급진적인 제 성격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 고대 그리스의 희극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를 높게 평가한 것도, 그가 기성 도덕의 위선을 거침없이 폭로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살아있을 때에도 대놓고 소크라테스를 까는 연극인 《구름》을 만든 이다. 당시 그리스의 살아있는 권력조차도 몇 번이나 연극으로 까내린 이다. 따지고 보면 우린 모두 제 생각을 거침없이 토해내고 싶어하지 않는가? 그걸 주저리주저리 읊기보다는, 뼈있는 문장 하나가 더 낫다. 만일 고대 그리스인을 멍청했다고 보자면, 그 이유는 소피스트에게 자식을 교육시킨 일이다. 아카데메이아에 보내지 않아서가 아니라, 디오게네스에게 보내지 않아서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남북 문제가 왜 작품 속에 드러나느냐'에 대해서. 이건 좋은 비판이다. 사실 드러나지 않는 게 진행이 좀 더 매끄럽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이 문제를, 그리고 그 상징물들을 무리하게 삽입하느라고 이 개들의 이동 경로를 완전히 꼬아놓았다. 아마도 시나리오 제작 중에 이런 생각을 했을는지도 모른다. '한국에 사람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면 당연히 DMZ 뿐이지. 냉전이 만들어낸 역설적인 평화의 공간. 그럼 남북 문제도 같이 다루자!' 하고 말이다. 이 영화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후반부의 떨어지는 사실성과 무리하게 삽입하려한 한국의 분단 문제일 것이다. 어쩌면 당시의 만연했던 한국통일의 낙관적 전망을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맺음
2019년 1월에 개봉한 이 영화의 최종 관객 수는 대략 19만 4000명 쯤이다. 한편, 2019년 8월에 개봉해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의 영향을 받았던 ― 소니 픽처스가 일본계 기업이라서 ― '앵그리 버드 2: 독수리 왕국의 침공'은 18만 9000명 쯤이다. 이 운동이 아니었다면 전작(앵그리버드 더 무비; 평가는 별로 좋지 않았다만 흥행에는 성공했다.)처럼 30만 명을 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2019년에 개봉한 두 영화 모두 평론가와 (그래도 객관적인 편에서 추린) 관객들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언더독에 대한 디시위키의(의외로 디시인사이드 애니-한국 갤러리에서는 별다른 의미있는 언급이 없었다.) 평가는, 맵기는커녕 의외의 단맛을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왜 이 영화가 국내서 19만 4000명쯤 되는 관객 밖에 동원하지 못했나 하면 이상한 일이다. 바로 전작인 《마당을 나온 암탉》은 200만 명을 가뿐히 넘는 수의 관객을 동원했잖은가? 이 문제의 해답을 알고자 하면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깊숙한 문제점과 관중들이 알게 모르게 가진 편견과 선입견까지 낱낱이 들춰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소수의견[편집 | 원본 편집]
상업성 뿐만이 아니라 시사적 문제를 다루는 만큼, 독자들에게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기 위해 소수의견을 등재한다, 헌법재판소가 그러하듯이.
- 의견을 제공해주신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립니다.
- 시노페의 디오게네스, 인물 설명:?(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키니코스학파의 창시자.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과 스스로 넉넉함을 느끼는 것이 행복에 필요하다고 말하고, 반문화적이고 자유로운 생활을 실천하였다. 뼈있고 강력하면서도 냉소적인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는 기행으로도 유명하다.)
- 공자
- 노론 2명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인물 설명:?(독일의 철학자이자 문학가이자 음악가로,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으로도 유명한 (능동적) 허무주의자. 기독교와 민주주의, 전체주의,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국가주의들을 배격하였으며 '군주 도덕'을 찬미하였다.)
- 서포 김만중, 인물 설명:?(조선 후기 문신, 한글 소설의 선구자. 주요 작품으로는 한문 소설인 《구운몽》, 한글 소설인 《사씨남정기》가 있다. 특히 《구운몽》은 부귀영화가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불교적 인생관으로 유명하다.)
- 백곡 김득신, 인물 설명:?(조선 중기 시인. 어려서 아둔하였기에 글을 늦게 떼었고 기억력도 좋지 않았으나, 그만큼 같은 책을 수만 번씩이나 읽은 것으로 유명하다.)
- 구좌파 1명, 설명:?(계급 의식에 기초하여 투쟁적 노동 운동을 중요시하는 좌파)
- 신좌파 1명, 설명:?(계급 투쟁을 넘어 권력에서의 인간 해방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비공산적 좌파. 동물권이나 소수자 권리 운동, 성적 자유주의를 주장하기도 한다.)
- 세르게이 겐나디예비치 네차예프, 인물 설명:?(제정 러시아의 혁명가로, 직업 혁명가당의 조직을 꾀하는 등 극단적인 혁명 운동을 주장하였다. 동지를 살해하고 망명하였으나, 뒤에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인 《악령》은 이 사건을 취재한 것이다.)
- KAPF?(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조선프로예술동맹, 카프) 회원, 민촌 이기영, 인물 설명:?(KAPF 동맹원으로 활동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과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을 조직하고, 곧 월북하였다. 작품에 《서화》, 《고향》, 《두만강》 따위가 있다.)
- 서해 최학송, 인물 설명:?(자신이 체험한 밑바닥 생활과 간도 생활을 바탕으로 하여 문학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신경향파의 기수로서 활동하였다. 작품에 《탈출기》, 《홍염》 따위가 있다. 이 가운데 《탈출기》는 신상옥 감독이 납북되었을 적에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 피터 싱어
- 크리스토퍼 버드
- 피터 톰킨스
- 톰 레건
- 환경보호론자 3명
- 폴 테일러
- 락토-오보 베지테리언?(유제품(lacto)과 난류(ovo)를 먹는 채식주의자(vegetarian)) 1명
- 조세희
- 파시스트 3명
- 국민혁명당 당원 1명
- 미국 정치 마이너 갤러리 부매니저, 자유의남근?(토요일 강남에서 '415부정선거' 시위하는 거 보고 게릴라 식으로 질의함. 노마스크에 침 튀기는 게 더러웠다만.)
- 자유의새벽당 당원 1명
- 기독교인 2명
- 횡보 염상섭, 인물 설명:?(자연주의 및 심리주의, 또는 사실주의 문학가. 작품에 《표본실의 청개구리》, 《만세전》, 《삼대》, 《두 파산》 따위가 있다.)
-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인물 설명:?(제정 러시아의 의사 지망생이자 소설가 겸 극작가. 하층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과 '체호프의 총'이라는, 1막에서 등장한 소품은 적어도 2막 또는 3막에서 반드시 쓰여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무대에서 치워야 한다는 규칙으로 유명하다. 작품에 《세 자매》, 《갈매기》 따위가 있다.)
- 빙허 현진건, 인물 설명:?(사실주의 소설가로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와 마찬가지로 하층민의 비극적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작품에 《운수 좋은 날》, 《술 권하는 사회》, 《B사감과 러브레터》 따위가 있다.)
- 금동 김동인, 인물 설명:?(가네히가시 후미히토(金東 文仁). 유미주의, 탐미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등 다양한 장르의 문학 작품을 썼다.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에 나오는 김창억이라는 미친 사람과 닮게도, 집안에 돈이 많았으나 그것을 자기가 다 탕진하였다. 그 바람에 돈이 궁해져서 친일로 돌아섰고 해방 후에도 이를 합리화하고 다녔다. 염상섭이나 이광수 등 많은 사람과 적을 두고 다니기도 하였다. 작품에 《배따라기》, 《광염 소나타》, 《감자》 따위가 있다.)
- 프랜시스 베이컨, 인물 설명:?(스콜라 철학을 비판하고 귀납적 탐구 방법을 확립한 철학자. 냉동이 부패를 얼마나 늦출 수 있는가를 이 방법으로 실험하다가 폐렴으로 죽었다.)
- 최인훈, 인물 설명:?(60년대에 자유와 민주주의와 이데올로기와 사랑에 대한 소설, 《광장》과 《구운몽》을 쓴 것으로 유명한 소설가이자 극작가.)
- 에피쿠로스, 인물 설명:?(하찮은 욕망을 버리면서도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주장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 만해 한용운, 인물 설명:?(승려 겸 독립운동가. 시집 《님의 침묵》으로 유명하다.)
- 장 칼뱅, 인물 설명:?(로마 가톨릭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예정설과 금욕을 주장한 종교 개혁가. 저서에 《기독교 강요》가 있다.)
- 동학 하근찬, 인물 설명:?(일제 강점과 한국 전쟁 후의 막막한 현실을 단편 소설로 풀어낸 소설가. 작품에 《수난이대》, 《흰 종이수염》 따위가 있다.)
- 보수주의자 1명
- 아나코 평화주의자 1명
- 보통 사람들 28명
- 총계 67명
디오게네스의 등장인물 및 줄거리 평가[편집 | 원본 편집]
그래서 개는 언제 등장하는 거임???
공자의 등장인물 평가 (feat. 호락논쟁)[편집 | 원본 편집]
그래, 내 제자 녀석, 재아(宰我)가?(공자의 제자 중에서는 '싹아지도없고개으르고 병시ㄴ'인데다가 궤변에 ― 《논어》에서는 그나마 좋게 쳐줘서 '언어에 능하다'라고 한다만 ― 능하고 하도 속물이라서 공자도 포기한 놈으로 나오는데 사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제후, 제공, 선현으로까지 추존된다.) 생각나는구나. 그 자식, 아직도 사람이 덜 되었단 말이지. 어찌 부모가 죽었는데 삼 년을 채 못 채우고 배부르고 등따수울 생각만 한단 말인가? 그래, 밤이의 경우는 양부모였으니 내 어느 정도 이해하마. 그러나 토리는? 자유로에서 죽은 건 토리의 어버이가 아니더냐? 그럼에도 하루가 지났다고 고라니 먹으며 헤헤 웃고 다니는 것은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할 수 없는 일이로다.
- 호론의 지지
- 이것이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입니다. 낙론에서는 오로지 이(理)?(만물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관점에서만 인간과 짐승을 바라보았기에 그러한 짐승 따위들에게도 오덕(인의예지신)이 존재한다고 보았으나, 공자님께서 가로신 장면에서 어떻게 짐승의 덕성을 볼 수 있냐는 말입니다. 기(氣)?(개별마다 달리 존재하는 것)의 관점에서는 만물은 모두 다릅니다.
- 낙론의 반박
- 그것은 이 활동사진을 유기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일단, 뭉치와 밤이는 모두 자신의 주위에 깔린 상황이 그르다고 판별할 수 있는 지가 있습니다. 또한 밤이는 자신의 친부모와 양부모가 죽었을 때 예를 다하지 못함에 울었고, 토리를 인의로써 돌보았으며, 실전 경험을 통해 쌓은 지식을 모두에게 공유하여 협동으로 고라니를 성공적으로 사냥했습니다. 알다시피, 협동에는 인의와 신이 또 반영되지 않습니까? 우리의 의견상,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덕성의 편향에 있지마는 이 활동사진에서 덕성의 결핍은 오히려 인간에게서 보여지는 것으로 나옵니다.
※호락논쟁(湖洛論爭; 인물성동이론, 人物性同異論)은, 조선 후기(18세기) 성리학에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 즉 사람의 덕성과 사물의 덕성을 같은 것으로 보는가 다른 것으로 보는가 하는 관념론적 문제를 놓고, 호론(湖論)의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과 낙론(洛論)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등장인물과 줄거리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이 영화는 개들이 낙타에서 사자를 거쳐 어린아이가 되는 내용이다. 각각의 등장인물은 처음에 인간에게서 받은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망각하지 못하고) 계속 앓고만 있었다. 그러나, 개선이란 무언가가 좋지 않다고 느낄 수 있는 자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런 자들은 이 경우에는 밤이와 뭉치다. 그리고 이들은 우연한 일?(달리 말하자면 의문스럽고도 끔찍한 일)로 여정을 하면서 그들의 트라우마를 극복해낸다, 비록 스스로 극복한 게 아니라 서로를 의지해서 극복했지만, '레츠터 멘슈'... 아니, 레츠터 훈트?(Letzter Hund; Last dog)에서 '위버멘슈'... 아니, 위버훈트?(Überhund; Overdog)로 되어가면서 나타나는 망각의 긍정적 장면은 볼 만했다. 이 영화에서 기억과 망각에 관한 직접적인 큰 연관이 있는 장면 가운데, 뭉치가, 과거에 대한 집착을 상징하는 공을 버리는 장면은 더 이상 과거의 일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로 새롭게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위버훈트가 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딛은 것이며 이 부분이 낙타가 사자가 되는 장면이다. 이는 짱아가, 이 또한 과거에 대한 집착을 상징하는 달수 인형에 집착을 보이고 그것과는 타의적으로 헤어진 데서 오는 비극적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채로 결국 인간에게 의지적으로 살게 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살려고 한, 즉 타인이나 통념이 정해놓은 잣대가 아닌 자신만의 새로운 잣대를 가지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려고 한 뭉치의 돌발행동과 뭉치가 가자고 나설 때까지 단지 현실에게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말만 던지고 정작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한 수동적 허무주의자들, 즉 다른 개들과의 대조적 장면이나, 사냥개에게 걷어차이고도?(자신의 객관적인 나약함을 부정하고 도리어 호탕히 웃으면서 자신의 상황을 어린아이들의 놀이처럼 긍정하며) 계속해서 덤비려는 행동도 좋았다. 다만, 자신의 주위에 깔린 비극적 상황을 긍정으로 바꾸기보다 이미 자신의 잣대에 적절한 곳을 찾아 떠나려 했다는 점은 뭔가 부족하다. 사냥꾼의 사냥개들에게 이러한 위버훈트의 사상을 알리려 하지 않았다는 점은 큰 비판거리다. 그리고, 군인들과 추격전을 하는 장면도 눈여겨 볼 만하다. 군인들은 바로 '용'과 같은 자들로 해야 한다는, 당위를 상징한다. 그리고 뭉치가 이 당위에 저항하는 것은 욕구와 의지, 그 가운데서도 '힘에의 의지'를 상징한다. 그리고 뭉치는 군인들을 뛰어넘음으로써 사자에서 어린아이가 된다. 이들의 삶은 여기서 완전히 성숙하였다. 자신의 맛이 가장 좋을 때, 그것을 남에게 맛보이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 창조의 정상에 오른 자들은 더 이상 구태여 삶에 집착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다른 초인이 될 세 어린아이를 낳은 이에게 희망과 행복이 있으라! 마지막으로, 나는 이 이야기에서 위버훈트의 몰락에?('몰락'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재창조의 전제'이다. 혹시 '창조적 파괴'라고 들어봤나?) 관한 내용도 좀 더 심화적으로 들어갔으면 한다. 그러니까, 임진강변을 '낙원'인 줄로 알았다가 갈밭이 불타버리자 다시 인간이 없는 '낙원'으로 이동하게 되는 일이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몰락이라고 볼 수 있다. 뭉치는 불타는 갈밭을 보면서 슬퍼하지 않고 계속 이동하자고 주장한다. 불타버린 벌판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했으면 좋았을 테지만. 이것이 위버훈트다운 것이다. 그러나 시청자는 이를 쉽게 의식하기 어렵다. 몰락과 함께 내리막을 걷는다거나 해가 지는 하강적 이미지를 넣었다면 어땠을까?
- p.s. 니체가, 자기가 언급한 (영단어에서 직역한) '운터훈트'라는 단어를 '레츠터 훈트'라고 바꾸라고 전했다. 자기는 민주주의가 싫지만 반유대주의도 싫고 전체주의도 싫으며 민족주의도 싫은 데다가 국가주의도 싫다면서, '운터훈트'라는 단어가 '운터멘슈'라는 나치즘 용어를 연상시킨댄다. 니체는 이 말을 전하고는 제 망치를 들고서 자기의 철학을 고의적으로 곡해한 제 여동생?(프리드리히 니체는 생전에도 여동생을 싫어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는 엘리자베트를 자신의 저서인 《이 사람을 보라》에서 대놓고 제 엄마와 함께 까내렸다. 왜냐하면 매우 진지하고 무거우며 절제하며 엄격한 루터교 신자인 것부터, 반유대주의, 전체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등, 엘리자베트는 프리드리히가 싫어한 것만 골라서 좋아했기 때문이었다.)(테레제 엘리자베트 알렉산드라 푀르스터-니체)과 나치와 네오나치들을 족치러 갔다.
- 김만중의 지지
- 옳소. 이 망치든 양반이 거 참 말 잘하오. 우리가 왜 현생에는 누릴 것을 다 누리면 안 되는 것이오? 죽으면 삶도 부귀도 명예도 별것 아니거늘. 살아서는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고, 죽기 전에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불도나 닦읍시다. 극락이나 가게.
- 김득신의 지지
- 망각을 밝게 보는 이가 있다니! 백이열전을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11만 3000번씩이나?(하루도 빠짐없이 하루에 열 번 읽는대도 30년 넘게 걸린다.) 읽은 나로서는 거 참 반갑구려. 사람들은 날더러 아둔하다지만,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는 아무도 모를 게요. 나도 막 잊어 버렸으니 그 느낌을 다시 즐기려 나는 가보겠소. 근데 거 이름이 누구요?
구좌파의 줄거리 평가[편집 | 원본 편집]
부르주아지?(Bourgeoisie; 자본가 계급)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무산계급)에게 가하는 착취와 핍박,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투쟁을 상징주의?(상징적인 방법에 의하여 어떤 정조나 감정 따위를 암시적으로 표현하려는 태도나 경향.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남.)로 짬뽕한 작품이다. 즉, 이 영화에서 부르주아지는 인간이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주인공인 개들이다. 사냥개들은 프티트부르주아지?(Petite-Bourgeoisie; 소시민)로 부르주아지도 아닌 프롤레타리어?(Proletarier; 무산자)들이 부르주아?(Bourgeois; 자본가의, 유산자) 마인드를 갖고서는 부르주아지의 개새끼가 되어, 같은 프롤레타리어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뭐 그건 냅두고, 이 프롤레타리어들은 부르주아가 없는 아나키?(Anarchy; 지배자가 없는)의 땅을 갈구하지만 그것을 부르주아지에게 항거함으로써 쟁취한다거나 그들의 헤게모니?(Hegemony; 주도권, 패권)를 스스로 구성하여서 인간들의 구시대적인 헤게모니를 뒤엎는 데 실패하였기에 (또는 항거의 의지가 약했기에 ― 인용자 주: 다만, 열정의 높낮이가 언더독과 피해자를?(Underdog and Victim)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는 하지만 언더독은 열정이 높은 쪽, 피해자는 열정이 낮은 쪽에 속한다. 이 둘의 공통점은 약점이 많다는 것. 그래서 이 해석은 작품의 제목과 정반대이므로 괄호로 처리했다.) 결국 부르주아지에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원래 존재하던 아나키의 땅, DMZ로 밀려나는 것이다. 과거 미국이 '개척'을 한답시고 원주민들을 '보호 구역'으로 몰아내었던 제국주의적 행태를 생각해 보라.
- 신좌파의 반박
- 어떻게 동물권의 문제가 헤게모니와 계급 투쟁으로만 고려될 수 있는 문제인가? 이 영화는 가족 영화이자 애니메이션이다. 동물권에 대해 대중적 접근을 실천하기 위한 영화를 억지로 노동자의 계급 투쟁으로 엮어 상징주의랍시고 폄훼하려 하지 마라. 우리는 이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여야 한다.
- 세르게이 겐나디예비치 네차예프의 비판
- 나약한 감정에 이성이 휘둘리는 이들, 부르주아적이고 퇴폐적인 이들이 입으로만 좌파에 혁명가를 자처하고 있다. 무릇 혁명가란 사적 이해도, 개인적인 일도, 사사로운 감정도, 집착도, 사유재산도, 심지어 이름조차 없다. 혁명가는 모든 관심과 생각과 열정을 혁명에 바쳐야 한다. 진정한 혁명가라면 낭만, 감수성, 격한 감정, 충동, 심지어는 사적인 증오심과 원한까지도 배제할 수 있어야 한다. 혁명적 열정이 그가 가진 제2의 본성이긴 하지만, 그것은 가장 냉철한 계산에 의거한 것이어야 한다. 진정한 혁명가는 개인적인 관심사가 어디로 향해 있는지가 아니라 혁명의 이해에 부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언제 어디에서나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감성에 온몸이 지배당한 이 영화와 구좌파와 신좌파는 심히 부르주아적이고 퇴폐적인 사상을 가졌다는 점에서 즉시 사형 선고를 받아야 한다.
- 이기영의 지지
- 영화도 예술의 한 갈래고, 그것의 서사는 또한 문예라는 점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를 통한 계급 투쟁과 혁명의 광고는 우리 기준에서 굉장히 신선하다. 뭐, 우리도 이러려고는 했다만 다들 검거를 당하고 결국엔 해체된지라... 어쨌든 우리보다도 탄탄한 문학성과 유희성과 대중성을 갖추고 있으나, 위의 '구좌파'가 언급한 대로 실패한(또는 어정쩡한) 항거를 상징주의로 보여주었기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사회의 현실을 혁명적 발전의 움직임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문학 방법론. 소비에트 작가동맹이 러시아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RAPF의 유물변증법적 이론을 비판하며 내세웠다. 이것이 전일본무산자예술동맹 NAPF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KAPF에로 전래되었다. 그러나 창작방법론에 대한 기존의 유물변증법적 이론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켜 KAPF가 해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고 스탈리니즘에 왜곡되어 근대주의, 세계시민주의, 형식주의 문학을 숙청하는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였다.)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비판을 당해야 한다.
- 최서해의 의견
- 나는 그래도 개들이 직접적으로 (또 우발적으로) 자신들을 억압하는 존재를 죽이는 쪽을 원했는데...
- 반박 1
- 그럼 전체 관람가를 못 받잖아. 그냥 모가지 물고 지뢰 밟는 선에서만 끝내라.
개체론적 환경윤리로 바라보는 평가[편집 | 원본 편집]
개체론적 환경윤리는 하나하나의 개체로서의 생명체의 도덕적 지위나 권리를 승인하고 그에 따라 도덕적으로 배려하는 것으로 자연 환경과 생태계를 보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개체론적 환경윤리는 방법론적으로 개체주의와 관련된다. 즉 전체를 이해할 때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 단위의 특성에 주목하여 설명하게 된다. 개체론적 환경윤리에는 크게 고통을 느낄 수 있는 하나하나의 개체 동물의 고통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론, 삶의 주체로서 삶을 살아가는 개체로서 동물의 도덕적 권리를 존중해야한다는 톰 레건의 동물 권리론과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것 자체로 고유의 좋음?(Good)을 가지고 이를 도덕적으로 배려해야한다는 폴 테일러의 생명중심주의가 있다.
― 수정 및 발췌 인용,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아래에 적힌 대부분의 주요 용어들은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에 맞춰 적혔다.
피터 싱어(동물 해방론)의 줄거리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중학교 도덕, 혹은 고등학교 윤리?(7차 교육과정)나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2009 개정 교육과정 이후)을 수강했다면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功利主義. 행위의 목적이나 선악 판단의 기준을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증진하는 데에 두는 사상. 개인의 복지를 중시하는 견해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내세우며 사회 전체의 복지를 중시하는 견해가 있다.)의 개념은 알 것이다. 최대 다수의 행복이 곧 좋음이라는 공리주의는 사람 뿐만이 아니라 동물에게 적용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받아 고통이 생기면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추구하고 싶은 '이익 관심'이 생긴다. 그리고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능력, 즉 '쾌고 감수 능력'?(快苦 感受 能力. 대한민국 동물보호법 제23조4항의 '감각능력'과 비슷한 말이다.)은 이익 관심을 가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이러한 쾌고 감수 능력을 가진 존재는 이익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 지위를 갖고, 도덕적으로 모두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이에 고통을 느끼는 동물?(어느 정도 자란 동물. 태 중의 동물이나 영아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것이 피터 싱어가 채식주의자이면서 낙태를 찬성하는 이유다.)과 인간의 사이에 이익 충돌이 있을 때 후자의 이익을 보다 중시하는 것은 '종 차별주의'이며, 동물에게도 평등 원칙을 당연히 확대 적용해야 한다. 쾌고 감수 능력을 가진 존재는 도덕적 가치에 의거하지 않더라도 도덕적 지위를 갖기 때문에 인간은 이들에게 도덕적으로 평등하게 대하고 고려할 책임이 있다. 이 영화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책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 크리스토퍼 버드-피터 톰킨스의 공동 의견
- 대략적인 내용은 이해가 가나, 식물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기에 쾌고 감수 능력을 가졌냐 그렇지 않냐에 관한 문제는 결국 인간 중심적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유감이 듭니다.
- 다른 반박
- 공리주의에 따르면 이들의 쾌락과 고통의 총량을 계산해야 하는데 쾌락 및 고통과 이익 관심을 어떻게 객관화하고 수치화할 수 있는 겁니까?
- 톰 레건의 반박
- 동물의 권리를 무시하여도 사람은 거기에 양심의 가책만 느끼고 끝인 겁니까? 불우한 아일랜드의 아이를 잉글랜드 부자의 저녁상 위로 올리는 풍경?(아일랜드의 작가인 조너선 스위프트의 수필, 《겸손한 제안》에서 발췌. 내용인즉, 식민지인 아일랜드는 가난에 허덕이는데 잉글랜드가 이를 돕지 않으니, 아일랜드의 갓난아이를 잉글랜드에 고기로 팔아 둘 다 이익을 얻자는 사회풍자적인 건의문이다.), 이는 옳지 않습니다. 동물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거기에 응당한 의무를 지녀야 합니다.
톰 레건(동물 권리론)의 줄거리 평가[편집 | 원본 편집]
개체, 즉 생명은 도구적 가치가 아니라 그 자체로 내재적 가치가 있다. 그것이 동물의 자율성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전통 철학에서 영유아, 지적장애인, 혼수상태자 등을 도덕적 무능력자로 보았고, 이들을 자율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보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도덕적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는 생명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존재기 때문이며 도덕적 무능력자일지라도 그들도 결국엔 삶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지각, 기억, 믿음, 자기의식, 의도, 미래에 대한 감각 등을 지닌 저들도 마찬가지다. 또한, 저들 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1년 이상된 다른 포유동물도 그러한 능력을 가지므로 이들도 동등히 대우받을 평등한 도덕적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행위에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는 도덕적 행위자, 즉 성인에게는 거기에 응당한 책임과 더불어 의무가 주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생태계의 보전을 위해 개체의 희생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바로 '환경 파시즘'이다. 사냥꾼의 비중있는 출연과 이와는 대조적인 노부부의 출연으로 의무의 태만을 비판하면서도 의무를 강조하는 점이 좋았다. 물론, 이런 점을 좀 더 비판하고 강조하는 내용이었음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 폴 테일러와 환경보호론자의 반박 1
- 1년 이상된 포유동물만 그런 권리를 가지게 했다는 것은 범위가 너무 협소하다.
- 폴 테일러의 반박 2
- 결국엔 또 도덕을 인간 중심적인 사고로 판단하는 것인가?
- 환경보호론자의 반박 2
- 개체의 권리 부여는 괜찮은데, 그렇다면 종은 어떤가? 멸종위기종일지라도 그들이 1년 이상된 포유류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들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아도 되는가?
폴 테일러(생명중심주의)의 줄거리 평가[편집 | 원본 편집]
목적을 추구하는 능력을 지닌 생명체는 늘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관념론의 입장을 취하였고, 염세관을 주장한 독일의 철학자로 '삶이란 곧 고통'이라고 주장했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이와는 달리 '고통도 삶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대지에서의 삶을 사랑하라'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의 사랑)라고 한다.)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표상은 인식이고 의지는 생명을 향한 맹목적 충동이며, 고통에 찬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술적 관조에 몰입하거나 욕구를 단절하고 범아일여(梵我一如; 인도 우파니샤드의 철학에서, 우주의 근본인 브라만과 개인의 중심인 아트만을 궁극적으로 동일하게 보는 학설)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저서)에서 말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의지인 '살려는 의지'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의사이며 철학자이고 신학자에 목사인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이 점을 바탕으로 '생명에의 경외'?(Ehrfurcht vor dem Leben, Reverence for Life)를 나타내었고, '생명 외경 사상'을 주장했다. 살아만 있다면 쾌고 감수 능력의 여부는 말할 것도 없다. 생명체에 대한 도덕적 존중을 마련하기 위해서 생명체에 대한 자연 존중의 태도가 있어야 한다. 이런 태도를 취한다면 도덕적 행위자는 자체적으로 좋음을 가지는 존재가 내재적 가치를 소유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자연에 대한 존중은 궁극적인 도덕적 태도로써 생물 중심적 관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생물 중심적 관점을 따를 때, 자체적 좋음을 지닌 자연적 존재에게 도덕적 행위자는 의무를 갖게 된다.
- 불침해(악행 금지)의 의무: 자체적 좋음을 갖는 존재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 의무
- 불간섭의 의무: 개별 존재의 자유에 제약을 금지하는 것과 생태계 진행과정에서의 불간섭의 의무
- 성실(신의)의 의무: 생물과의 신뢰를 깨지 말아야 하는 의무
- 보상적 정의의 의무: 앞의 세 의무가 어겨질 때 도덕적 행위자와 생물 사이에 정의의 형평성을 회복시킬 의무
이 네 가지다. 이 네 가지 의무를 모두 저버린 사냥꾼의 비중있는 출연으로 인간을 비판하는 내용은 물론이고, 사람이 아닌 개들 중심적으로 바라보는 사건과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지역에서 생태계가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엔딩 장면은 흡족할 만했다.
- 락토-오보 베지테리언의 반박
- 동물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젠 달걀에 식물 먹는 것도 비판하렵니까? 그럼 이젠 유제품만 먹고 살게요?
- 폴 테일러의 답변 1
- 인간의 생존을 위해 동식물 모두 식용이 가능합니다.
- 다른 반박 1
- 그럼 이거 자기 모순이잖아요. 생태 통로가 있는데도 로드킬이 끊이지도 않는데, 네번째 원칙인 '형평성을 회복시킨다'라는 것도 그 보상은 인간의 관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요?
- 온건적 환경보호론자의 의견과 반박
- 환경 문제를 인간이 아닌 비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재고한 부분이 큰 의의를 갖는다는 점은 인정하나, 인간이 없는 곳에서 생태계의 완전한 회복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며 실현이 어렵다. DMZ는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으로 인해 생긴 특수한 경우일 뿐이다. 생태계를 파괴한 주체가 인간이면 네번째 의무에 따라 인간은 생태계 회복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는 자기 모순이다.
- 같은 관점에서 제기하는 반박
- 저 개들은 사람과같이 인격과 이성을 지닌 존재로 묘사되기에 도덕적 행위자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개들의 사냥 행위는 내로남불이 된다. 이 점은 왜 언급하지 않는가? 나는 이 장면이 굳이 필요할까 싶다. 이들의 협동을 드러내자면 사냥개와의 싸움에서도 잘 드러난다.
- 폴 테일러의 답변 2
- 생존을 위해 동식물 모두 식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이렇게 어쩔 수 없이 생명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존재할 경우, 도덕적 행위자는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 다른 반박 2
- 그래도 이거 자기 모순이잖아요.
조세희의 줄거리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지섭은 아버지에게 이 땅에서 우리같은 언더독이 기대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
"왜?"
아버지가 물었다.
지섭은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하긴!"
"아저씨는 평생 동안 아무 일도 안 하셨습니까?"
"일을 안 하다니? 일을 했지. 열심히 했어. 우리 식구 모두가 열심히 일했네."
"그럼 무슨 나쁜 짓을 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법을 어긴 적 없으세요?"
"없어."
"그렇다면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어요."
"기도도 올렸지."
"그런데, 이게 뭡니까? 뭐가 잘못된 게 분명하죠? 불공평하지 않으세요? 이제 이 죽은 땅을 떠나야 됩니다."
"떠나다니? 어디로?"
"달나라로!"―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알아보시겠습니까? 제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조금 고쳐서 따왔습니다. 다만 '언더독'이라는 단어를 덧붙인 것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던 사회적 약자의 범위는 늘어났다는 것을 보입니다. 또한 그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대우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것도 보여 줍니다. 이 소설이 처음 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난 현재에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제 소설과는 달리 밝고 희망찹니다. 그래서 사실성이 조금 떨어질는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제 소설에서 난장이네는 달나라로 가지 못 했습니다. 오히려 더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달나라는, 바로 DMZ입니다. 억압하는 이도, 억압받는 이도 없는 땅. 저는 적어도 대한민국이 이런 땅이 되기를 바랍니다.
국민혁명당-미국 정치 마이너 갤러리-자유의새벽당의 공동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인용자 주: 너무 좆같이 썼다. 그지?
- 져먼쉐빠뜨?(저먼 셰퍼드; 도이처 셰퍼훈트)가.지상락원이라는..같잖은소리나.해대는것은.관객들에게.주체사상을.주입하기위한.도구다.
- 져먼쉐빠뜨는.탈영병인데다가?(어딜 봐서 이런 주장을 하는지는 모르겠다만)..문재앙정권.치하의.대한민국에.태극기에.충성을하는.장면은.겉으로는.군견출신임을.포장하는도구이나..속셈은.자유롭지도.정의롭지도.못한.?(국기에 대한 맹세 중,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는 대한민국이 자유롭지도 정의롭지도 못하다면 충성을 다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한다.)문재앙의개쉐끼가.되겠다는의도를.담고잇따.
- 개장수가.개를.학대하는것을.더러.진보좌좀발강이.영화평론가들은.레알리즘?(Realism; 리얼리즘, 사실주의)이라고.지랄하지만..사실은.사회주의적.레알리즘으로..개돼지의분노를.고양시키는쪽을.의도하고.조련하고잇따..그래서.나는.개장수를.지지하렷다.
- 위대하고.힘찬.국군을.당나라군대로.묘사하는것은.저딴엔.개그니뭐니로.포장하구잇다만ㅎㅎ..이는.국군을.폄훼하는.선동과날조다.
- 보다꼬리?(보더 콜리)가.마취되서.맞는주사에.산화그래핀?(코로나19 백신에 섞여 있다고 망상하는 물질이다. 산화(O)에 그래핀(C)이면 이산화탄소(CO₂)인가?).마이크로칩.배리칩?(베리칩, 음모론자 사이에서도 해묵은 주제다.)이.분메히.들어잇을기다.꼴애.법이니.동물보호니.운운하는.쉐리덜은.다~~.딥스?(딥 스테이트(Deep state), 미국 정치 마이너 갤러리를 포함한 트럼프주의자들의 망상 가운데서도 최상위급의 망상으로 미국 민주당(특히 힐러리 클린턴)이나 빌 게이츠 등이 가입한 그림자 단체라고 한다. (일루미나티나 프리메이슨은 이제 너무 빛바랜 음모론이잖나.))다.
- 누구든지.이표?(짐승의 표와 짐승의 수 666, 미국 정치 마이너 갤러리에서는 코로나 19 백신을 짐승의 표로 보고 있으나, 기독교 주류와 역사학 주류에서는 짐승의 수 666을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로 본다.)를.가진자.외에는.매매를.못하게하니..이표는.곧.짐승의.이름이나..그.이름의수라..지혜가.여기잇으니..총명한자는.그.짐승의수를.세바라..그것은.사람의수니.그수는.666이니라.!-요한게시록 13:17~18,.ㅋㅋㅋ.팔로우.더파티.ㅋ.
- 유기견들은.로동자와.철거민을.의미하구..들개들은.빨찌산?(Partizan; 파르티잔 또는 빨치산.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주의 게릴라에서 유래되었다.)을.의미한다..이영화는.이들의.월북을.다루므로..즉.빨갱이영화닷!국보법위반!땅땅땅!
- 반박 1
- 와 이래서 MPOV?(Multiple Point of View; 다중관점)가 무섭구나;;; 이런 틀딱들 음모론 얘기도 들어줘야 하고....
- 반박 2
- 태극기에 충성한 게 문제면 2015년 하반기와 2016년에 입대한 사람들은 박근혜도 따르고 문재인도 따른단 얘기냐?
- 반박에 대한 동조 1
- ㄹㅇㅋㅋ 미정갤에서 그렇게 물고빠는 우주군도 이제 바이든이 명령내리는데
- 반박 3
- 옘병할, 언제는 꼬우면 북한에 이민을 가라고 하더니 이제는 빨갱이 영화네 하면서 자빠져 앉았냐? 그리고, 남에게 북송을 시키는 짓거린 너희들 주특기 아니냐?
- 기독교인의 반박
이거나 반박하셈.그리고 나는 어린 양이?(어린 양은 예수를 의미한다.) 시온 산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 양과 함께 144000명이?(144000은 그리스도의 참된 백성의 수를 '상징적으로' 의미한다. 그러므로 144000은 그 수 자체의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에 담긴 상징과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등의 사이비 종교나 이단에서 흔히 범하는 오류다.) 서 있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 요한계시록 14:1
염상섭의 줄거리 평가[편집 | 원본 편집]
개가 사람말 허구 댕기는 거는 얘기 진행상 머 그렇다구 치더래두, 난 요기에 자연주의?(정신 현상을 포함한 모든 현상을 자연의 산물로 생각하고, 자연 과학의 방법으로 이를 설명하려는 경향. 문학에서는 등장인물의 비참한 현실을 유전(《루공-마카르 총서》 등)이나 주변 환경 또는 사건(《표본실의 청개구리》, 《만세전》, 《술 권하는 사회》, 《감자》 등)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고,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현실을 관찰하고 해부하여 실험 보고서처럼 작성해 간다. 즉, 가설 설정부터 검증까지 말이다.)적 요소나 또... 머 그런 거 있잖애, 여튼 그런 거가 부족헌 게 좀 아쉽단 말여. '왜 우리가 인간들에게 쫓겨 살어야 허는 거야요?' 같은 질문을 누군가 헐려구 허믄, 다들 게서 말을 끊구서는 화제를 돌릴려 그려. '왜?'라구는 물어두, 그 '왜?'에 관허여서는 답을 않는단 게야. 함 나열해 바?
요건 반쪽짜리 실험 보고서다. 그리구 말여, 저들이 현실의 문제를 의식험에두 그걸 바꿀려구 노력을 허기는커녕 그런 의지조차 뵈지두 않구 현실도피허듯이 비무장지대루 가는 건, 내 보기엔 《만세전》에 나오는 이인화 요 애새끼랑 진배없다.
-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현진건의 공동 의견
- 그래도 사실주의의 입장에서 하층에 깔린 저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폭로하고 있잖나? 난 그래도 만족스러운데.
- 김동인의 냉소
- 니도 꼴에 자연주의랍시고 글 좀 쓸 거면 에밀 졸라?(Émile Zola. 프랑스의 작가이자, 자연주의 문학의 수장이며,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을 고발하고자 한 언론인. 작품에 《루공-마카르 총서》 따위가 있다.) 급으로 쓸 게지, 에밀 졸라의 발가락을 닮게 그리면 뭐하자는 게야. 환경 결정론적인 등장인물 행동과 성격의 입체적 변화는 썩 괜찮은데 말야. 니 소설은 이거랑 발가락이 닮았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등장인물과 줄거리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이 영화는 우상?(프랜시스 베이컨의 우상이란 기독교의 우상(《표준국어대사전》의 '우상4'의 3)이 아닌 철학적 우상(《표준국어대사전》의 '우상4'의 4)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우상은 네 가지로 나뉜다. 어떤 권위나 전통에 기대어 생각하고 판단할 때 범하는 '극장의 우상', 개인적인 특성이나 환경 및 교양 따위에 따라 사물에 대한 바른 견해와 판단을 그르치는 '동굴의 우상', 언어를 바로 그 사물 자체로 생각하는 데에서 생기는 ― 예컨대 추상적 개념인 무언가(감정이나 이데아 따위)를 언어로 표현하고자 할 때 생기는 ― '시장의 우상', 사람이라는 종족의 본성에 근거하여 사물을 규정하는 ― 예컨대 어떤 자연물을 의인화하여 보는 ― '종족의 우상'이 있다. 베이컨은 수많은 실험과 객관적 관찰과 반복을 통한 귀납 추론으로 우상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덩어리다. 집개였던 이들이 고라니 먹기를 몬도가네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것은 동굴의 우상이요, 철책이 있다는 것과 희미한 경험 및 기억만 믿고서는 DMZ 아닌 임진강변을 사람이 없는 낙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개코'의 행동 또한 동굴의 우상이며, 그런 개코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따라간 모든 이들의 행동은 극장의 우상이다. 더불어, 개들에게 인격과 이성을 부여하고는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서사를 풀어 나아가는 것부터가 종족의 우상이며, 마지막으로, '뭉치'는 이미 그 자체로 우상?(Idol; 아이돌)이다. 이런 우상숭배자들. 그리고, 이 영화의 줄거리는 나랑 잘 안 맞는다. 내게 자연은 인간이 지배해야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야, 르네 데카르트도 이렇게 말했잖았나?
최인훈의 줄거리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이 세상은 누군가 말을 한 마디 할 때마다 풍문이 되어 두터운 지층처럼 굳어서, 가끔은 변성암처럼 과장이나 왜곡이 되기도 하고 단층처럼 어긋나 모순이 되기도 합니다. 영화 초반에서, '뭉치'와 뭉치의 옛 반려자의 행동을 봅시다. 옛 반려자의 '기다려'라는 말은 그 상황에서는 '아직 네 공을 던지지 않았으니 그 공을 물려고 하지 말고 앉아서 가만히 기다리라.'라는 의미로 쓰였을 겁니다. 그러나 뭉치는 '내가 가더라도 그 자리에서 기다리라'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해석만을 믿고 한나절이고(소설판에서는 사흘씩이나) 기다립니다. 뭉치에게 공은 자신과 반려자를 잇는 매개물입니다. 그러나 그 반려자에게는 단순히 뭉치가 좋아하는 장난감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뭉치가 공을 버린 것은 자신과 반려자, 더 나아가 인간과의 연결고리를 끊음과 동시에 자신이 좋아하던 것까지 포기해 가면서, 기다리라는 풍문, 이 세상 어딘가에 철책이 선 낙원이 있다는 풍문, 그리고 여러 이런저런 풍문을 헤쳐 진정한 낙원이라는 현장을 찾아 나아가길 바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뭉치가 풍문에 만족하지 않고 드디어 현장을 찾아가려 할 때, 갑자기 나타난 까마귀는 바로 운명을 상징합니다. 뭉치는 그 운명을 쫓아가 운명적으로 북한산의 출입금지 구역에 닿습니다. 그러나 어설프게 선 광장입니다. '개코'가 흘려놓은 풍문에 오염된 뭉치의 관념은 스스로의 객관적 판단을 흐립니다. 그리고 그 우상을 깨뜨린 건 들개들입니다. 뭉치는 다시 풍문에 만족치 않고 이들과 함께 '낙원'을 가면서도 수많은 운명을 맞닥뜨립니다. 그리고 이 운명들은 이들 스스로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쩌면 이들에겐 자신들에게 주어진 운명을 즐겁게 받아들인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인간들의 품 아닌, 자연이라는 '낙원'과 광장으로 회귀하는 데 성공합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제 소설, 《광장》에서 이명준이 투신한 광장은 탈이데올로기적이고?(脫Ideologie的--; Ideologie(이데올로기)는 학설, 교리, 주의, 교훈, 철학, 신념, 이론, 이념, 사상 등의 통칭으로, '탈이데올로기적'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성격을 띠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남에 관계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상태로 된'을 뜻한다.) 자연적이며 아가페?(Agapē; 무조건적인 사랑)의 광장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명준이 알 수 없는 경로로 녹색지대이자 회색지대인?(콘월어와 전근대 웨일스어로 'Parth glas'?) 저 광장을 갔다면 어땠을지를 잠시 고민해 봅니다.
에피쿠로스의 줄거리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즐거움?(ἡδονή(hēdonḗ); Enjoyment, Pleasure, Delight; 기쁨, 쾌락)을 좇는다. 그 즐거움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물론, 물질적인 데서 비롯되는 즐거움도 있지만 이 기쁨과 즐거움은 좇으면 좇을수록 멀어지며 고통스러워진다는 점에서 진정한 기쁨도, 진정한 즐거움도 못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진정한 즐거움을 욕구의 실천과 달성으로 얻는다. 욕구는 자연적이면서도 필요한 것, 자연적이지만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 부자연스럽고도 불필요한 것으로 나뉜다. 우리는 그 중에서 타인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선에서 자연스러운 것만 취하면 된다. 그 자연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배고프면 먹고자 하는 욕구, 피곤하면 자고픈 욕구, 편히 쉴 수도 있고 위협에서 보호받을 수도 있는 집 한 채를?(2개 이상 주택 소유는 용납 못 하느니라.) 갖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굳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기는 한 성욕?(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운 좋은 거다.) 등을 말한다. '낙원'을 가기 전의 저들의 생활을 돌이켜 보자. 저들은 먹는 것도 힘겹게 얻어야만 했고, 서식처는 불완전하여 얼마든지 위협에 노출된 상태로 안주한다는 것부터가 역설적이라고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이들을 잡아 족치려는 사냥꾼의 위협까지 말이다. 여하튼 최악 가운데서도 최악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즉, 이들의 여정엔 당위성이 있으며 그 목적은 역시 현대 인권의 기본 개념과같이 삶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내가 그래서 내 학파에 노예부터 창녀까지 다 수용한 것이다.) 자연스럽고도 필요한 욕구이다. 반면에 영화 속 인간들의 욕구는 부자연스러우면서도 구태여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낙원'에 가까워지면서 나타나는 이들의 기본적 욕구의 점진적 충족은 나의 쾌락주의를 자세히 드러낸다.
한용운의 등장인물 평가[편집 | 원본 편집]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로 하고, 헤어짐은 만남을 전제로 한다. 일면식도 없는 개를 데려와서 그의 임종을 지켜주고 기룬?(기루다(동사): 어떤 대상을 그리워하거나 아쉬워하다) 것, 납치당하여 죽은 개를 불쌍하고도 가련하게 여겨 기룬 것, 그리고 교통사고로 개 둘을 떠나 보내고 철망 너머에서 그들을 기룬 것은, 그들이 저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저들을 떠나 보낼 때, 이별을 쓸데없이 눈물의 원천으로 만드는 것은 그 뒤에 있을 만남의 희망마저도 눈물에 실어 흘려 보내는 것이고 마음 속에나마 남아있는 사랑하는 이마저도 떠나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눈물 몇 방울을 흘리고 나서야 이를 깨닫고 그 슬픔을 이겨내었다. 그리고 저들은 이 슬픔의 힘을 희망의 정수박이로 옮겨 들이부어, 고해(苦海)를 넘어, 극락(極樂)에 닿았다. 마음에 드는 내용이다. 독립운동가의 입장에서, 저들을 우리와 같은 처지의 민족과 국가들로 보고 저들을 억압하는 이를 제국주의자로 보아도, 이 영화는 내가 《님의 침묵》에서 전하고자 했던 바에 시나브로 다가가고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줄거리 평가[편집 | 원본 편집]
And the fear of you and the dread of you shall be upon every beast of the earth, and upon every fowl of the air, upon all that moveth upon the earth, and upon all the fishes of the sea; into your hand are they delivered.?(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길짐승과 바닷고기가 다 두려워 떨며 너희의 지배를 받으리라.)
― KJV, Genesis 9:2?(킹 제임스 버전, 창세기 9장 2절. 한국어 번역은 공동번역성서)
인간이 자연을 수단으로써 쓰게 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만 내려준 특권이다. 그렇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지구의 지배자는 인간이다. 냉정하게 이제 개, 고양이, 심지어 맹수들과 맹금들도 인간들의 도움 없이 지구에서 살 수가 없다. 자 그럼 이제 어떡할까? 소돔과 고모라 제2탄 인페르노 파티라도 열까? 대홍수를 일으켜 방주에 탄 놈들만 살릴까? 하나님께서 예정지어주신 운명을 감히 개새끼들이 제 좆대로 하겠다고 거스르고 나서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중죄 가운데 중죄이다.
- 의문 1
- ? 분명 인간 중심주의과 그 관점을 비판하는 영환데 보고도 이러는 사람이 있나?
- 반박 1
그럼 이건 뭐임?"엘리사는 돌아서서 아이들을 보며 야훼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 그러자 암곰 두 마리가 숲에서 나와 아이들 42명을 찢어 죽였다."
― 공동번역성서, 열왕기하 2장 24절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반박
-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약자 중심적인 기성 종교의, 노예 도덕이라는 굴레를 스스로 둘러메고 안주하는 나약한 인간, 즉 인간말종의 표상이다. '하나님께서 예정지어주신'? 자유의지도 없고 스스로를 괴뢰놀음?(꼭두각시놀음)의 괴뢰?(傀儡, 꼭두각시)로 만든 이가, 괴뢰를 조종하는 이의 생각을 괴뢰의 입으로 토하고 있다. 추레한 수동적 인간. 예로부터 제대로 되어먹은 기독교인은 예수 한 명 뿐이었다. 그가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줬기 때문이다. 적어도 저 개들이 너보다 더 예수와 가깝다.
- 더 웃긴 건 뭔지 아나? 예수를 죽인 것은 바로 저런 인간이라는 것이다. 신이 주는 동정에 제 약점과 상처를 어루만져지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이런 인간말종들이 신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신 말고도 이런 자를 동정할 이는 지천에 널리고 널렸다. 결국엔 제 삶을 고통으로 여기며 부정하고 싶을 것이다. 예수의 기쁜 소식은 십자가에서 함께 죽어 버리고, 예수의 가르침을 포즈로만 배운 이들은 산 입으로 죽음을 ―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멸망적 교리만을 ― 외쳐댄다. 저들은 대지의 피부병이다.
- 장 칼뱅의 반박
- 예정설을 인용할 거면 제대로 좀 인용해라. 저 개들 뿐만이 아니라 등장하는 모든 이의 모든 행동은 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것이다. 그런고로, 저들은 그 운명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어주신 대로 산다는 게 예정설이다. 네가 그러고도 기독교인이냐?
하근찬의 줄거리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집개들은 '낙원'의 위치를 알지만 사냥의 기술은 없다(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이 없다). 반면에 '들개'들은 사냥의 기술은 있지만 '낙원'의 위치를 모른다(안주할 거처의 위치를 모른다). 내가 쓴 《수난이대》의 두 등장인물, 일제 때 징용에 끌려갔다가 팔을 잃은 아버지 만도와 육이오에서 다리를 잃은 아들 진수와 같은 관계이다. 그리고 내가 그 소설에서 보였듯이 사회 문제를 극복해내기 위해서는 세대는 물론이고 서로 반목하던 단체끼리도 연합해야 한다. 이른바, 오월동주다 ― 만도와 진수가 반목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 둘은 각각 있었을 때, 사냥꾼에게 쫓기고만 다녔다. 그러나 뭉치고 나서는 사냥꾼의 사냥개들을 이겨내고, 마침내 사냥꾼도 이기게 된다. 사회의 비참한 이들이 어떻게 뭉쳐서 극복하고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기타 소수의견 1 (줄거리)[편집 | 원본 편집]
개들에게 비무장지대가 과연 낙원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이 점이 의문스럽다.
- 반박 1
- 그것은 동물이 사람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주의 야생 동물인 딩고(Canis lupus dingo?(Canis는 라틴어로 개, Lupus는 라틴어로 늑대를 가리키는 단어로, Canis lupus는 개속 동물 가운데서도 회색늑대(종)를 가리킨다. 유전적 차이가 별로 없어 별개의 종으로 보지 않는 개(Canis lupus familiaris)와 딩고(Canis lupus dingo), 유라시아늑대(Canis lupus lupus), 말승냥이(Canis lupus chanco) 등끼리 서로 잡종 2세와 3세 그 이상 등도 생산할 수 있다. 가장 근연종인 코요테와는 2세까지만 생산 가능하다고 여겨진다.))도 원래 사람이 기르던 개였다.
- 보충 의견 1
- 작가들도 그 점을 고려하여, 짱아는 노부부 집에 남는 것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 보수주의자의 의견
- 비무장지대를 낙원으로 설정한 데는 분명히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을 것이다.
- 다른 의견 1
- 난 이 영화를 잘못 해석해서 '사람들이 개를 버려도 이렇게 잘 살아갈 수 있다'라고 전달되는 게 우려된다.
- 아나코 평화주의자의 의견
- 전쟁이란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을 가스라이팅하며 노는 반윤리적 행위다. 그 가운데서의 비무장지대란 그야말로 태풍의 눈이자, 말 그대로 낙원일 수 밖에 없다. 비록 상징주의로 짬뽕된 점이 많다만, 《웰컴 투 동막골》이 생각나지 않는가?
- 다른 의견 2
- 뭉치와 군인들의 추격 장면이 굳이 필요했을까?
- 보충 의견 2
- 그야, 자유가 그렇게 무작정 돌격하는 걸로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니깐.
- 다른 의견 3
- 처음엔 진짜 꼬꼬마 애들이나 보는 디즈니식 유치찬란 뮤지컬 애니메이션 영화(예컨대, 《겨울왕국》 같은 거 말이다. 노래만 빼면 나머진 그냥 속 비어있는 말 그대로 공갈빵인데, 노래가 그렇게나 좋던가? 그런 의미에서, 디즈니 영화엔 언제 'Always Look on the Bright Side of Life'가 등장하는 것인가?) 생각하고 갔다. 근데 이건 어린이도 볼 수 있는 성인용 애니메이션이었다. 좆잡고 반성 중이다만,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나 보는 거라는 선입견 때문에 유아용 TV 애니메이션만 주구장창 찍어대는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악순환을 끊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기타 소수의견 2 (성우)[편집 | 원본 편집]
도경수의 '뭉치' 연기는 별다른 튐없고 괜찮은데 박소담의 '밤이' 연기는 어째 후반으로 갈수록 조금 딱딱해진다. 연지원의 '토리' 연기는 뭐 두 가지 관점이 있을 텐데, 리얼리즘의 입장에서는 어린애의 살짝 삑사리나는 목소리까지도 제대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만큼 듣기가 좀 거슬리는 면도 있다. 그래도 연기 실력은 좋았다. 아니 근데 진짜 실제로 어린애였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 이게 데뷔작이라니.... 그럼 이건 하이퍼리얼리즘인가? 어쨌든, 박철민의 '짱아' 연기는 발음이 조금 부정확한 데 빼고는 그럭저럭했다. 서승원의 '토리아빠' 연기는 조금 과장이 섞여 들어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외에도 '아리'와 달 역의 전숙경이나 '봉지' 외 조연 4개?(공단직원, 운전자, 박 일병 외 1개)의 탁원정, 기타 조연을 맡은 김정은?(농장주인, 선임하사, 사냥꾼2, 렉카차운전자)이나 송정희?(토리엄마, 방울이 외 2개), 한신정?(추어탕집주인 외 1개)은 전문성우이니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까리 역의 박중금이나 개코 역의 강석, 사냥꾼 역의 이준혁 등도 각각 뮤지컬 배우, 희극인 등을 맡은 긴 경력 덕인지 연기가 생각보다 자연스러웠다. 그래도 전문 성우를 썼음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어떻게 전문 성우가 조연에 몰려 있을 수가....
기타 소수의견 3 (그림체)[편집 | 원본 편집]
2D 배경에 3D로 움직이는 물체가 부조화처럼 보이는 면도 있지만, 자연을 자세히 담은 풍경에서는 한국화 같은 모습도 볼 수 있고, 파스텔톤에서 오는 산뜻함이 마음에 들었다.
- 의문 1
- 그건 그렇고, 난 뭉치의 털 색 조합이 왜 흑백이 아니라 흰색에 쪽빛인지 모르겠음. 봉지도 아예 비취색인 것도 그렇고.
- 추측 1
- 흑색 계열은 파스텔톤이 없었나? 가끔 흑색과 청색을 혼동하는 일이 더러 있으니까(전근대 스웨덴어나 서부 보트니아어에서 blå가 검은색과 파란색을 아우르는 단어이고 켈트어파의 언어들의?(웨일스어, 아일랜드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맨어, 콘월어, 브르타뉴어. 이 중에서는 웨일스어, 아일랜드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콘월어만 해당.) glas는 녹색, 파란색, 회색을 아우르는 단어이듯이) 청색 계열로 대신 썼나 보지.
- 또 다른 의문 1
- 그럼 밤이는 ― 뭐, '블랙러시안' 종이라지만 ― 왜 쪽빛도 밤색(#800000; a.k.a. Maroon)도 아니고 검은색임?
- 다른 의견 1
- 한국화 같다는 점이 오히려 해외에서 잘 안 먹힐 가능성이 있다. 동양화가 전반적으로 외형의 사실적 묘사보다는 인물과 사물의 내면과 기를 잘 드러내거나, 작가의 현재 상태를 그림에 불어넣는 쪽으로 이론이 발달해서 말이다.
기타 소수의견 4 (등장인물)[편집 | 원본 편집]
동화적인 명백한 선악구도에 중점을 두어서 공연히 스테레오타입으로 빠지는 것 같다는 느낌도 있고, (이게 '언더독의 도그마'라나?) 가끔씩 얘가 왜 이러나 싶은 데도 있다. 특히 '밤이'가 '뭉치'에게 무심한 듯 시크하게 말하는 부분;;;
- 다른 의견 1
- 나도 그것 때문인지 내용이 좀 작위적이라는 느낌부터 든다.
- 반박 1
- 대부분의 주조연이 흑백처럼 딱딱 갈라진 선악구도에 맞춰진 것은 일단 이 영화가 일반 대중, 특히나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졌기에 그런 것이다. 한편, 그렇다고 해서 모든 등장인물들이 선악이 명확하게 드러난 것도 아니다. 예컨대, 군인들은 그 역할이 휴전선을 지키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북한의 남침이나 무장간첩 등의 침공이 있을 수 있기에 그 역할은 당위성을 가진다. 게다가 뭉치가 수류탄으로 위협을 가한 것도 있고 월경을 시도하려 한 점도 있잖나? '군인들'이, 개들이 통문을 넘지 못 하게 하려 한 것은 서로의 당위가 충돌했고 서로의 당위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군인들을 가리켜 무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반박
- 선악 구도는 노예도덕의 관점에서나 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냥꾼이 나쁘다고 개들은 선하기만 한 존재이던가? 어디를 봐서 그렇다는 말인가?
기타 소수의견 5 (노래 《꿈꾸는 그곳》에 대한 추론적 읽기)[편집 | 원본 편집]
가사 한 줄마다 주석으로 추론적 읽기에 따른 해석을 달 터이다. 그러니, 이 부분을 읽고자 한다면 커서를 가사 위에 대어라. 모바일이라면 클릭하여라. 그리하면 해석이 보일지니, 네 의견과 비교하고 대조하여라.
-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사람이 DMZ 깊숙이 들어가는 개들을 보는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뭉치가 딱 한 번 뒤돌아본 일 외에는 개들이 이들에게 뒤돌아본 일은 없으므로, '뒷모습'이라고 한 데는 저들이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제 길만을 바라보며 나아감을 강조하고 싶은 데가 있음을 나타낸다. 뒤돌아봤다면 뒤통수, 즉 뒷모습이 아니라 '그 모습'이라고 했겠지.)
- 눈앞에 비친 낯설은 세상?(개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DMZ의 풍경을 서술하고 있다.)
- 내 주위를 가득 채우던
그 쓸쓸한 공기?(사람과같이, 개들도 무리(Pack; 팩)와 사회를 이루는 동물이고, 소설판 서문에 적힌 바와같이 사회는 여러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고 자기라는 것은 자기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는 동물을 유기하는 사람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이 되기도 한다.)
- 머리 위로 부는 바람에
문득 다시 고갤 들었을 때
어느샌가 지친 내 곁을
함께 지켜준 소중한 너?('머리 위로 부는 바람'이 상징하는 바는 불분명하나, 자신이 의지할 만한 실체적 존재에게 고마움과 소중함을 느끼고 있다.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자기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서로 의지할 만한 대상의 필요성을 보이고 있다.)
- 끝없는 밤을 지나서?(밤의 어두운 속성과 '끝없는' 이라는 관형어를 통해 수없이 헤쳐 나아가야만 했던 고난과 역경을 상징하고 있다.)
- 새벽을 건너 아침이 와도?(새벽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불분명하나, 밤과 아침 사이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과도기나 이행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아침은 해가 막 밝게 뜬 시간이므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긍정적인 것들, 그러니까 자유, 행복, 평안 등이 실현된 상태를 말한다.)
- 그날을 기억할게?('그날'이 구체적으로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문맥상 끝없던 밤이나 어제, 즉 과거라고 치자. 무슨 이유에서 이걸 기억하리라고 말하는진 모르겠다만, 어쨌든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 구절을 부정적으로 볼 것이다.)
- 행복을 찾아 함께 달려가?(이 문장은 토리아빠가 뭉치에게 말했던, 살기 위해 달린다는 말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다운 삶을 산다는 것부터가 행복을 만족하기 위한 전제 조건 아닌가?)
- 꿈꾸는 그곳으로?('꿈꾸다'라는 동사가 ― '꾸다'는 타동사로만 쓰이지만 ― 한국어에서는 능격 동사(能格 動詞), 즉 자동사이면서도 타동사이다만, '그곳'은 장소, 즉 무정물이므로 주어를 '그곳'에 두지 말고 '나' 또는 '우리'라는 주어가 생략되었다고 치자. 즉, 그곳은 '이상향'이다. 저들은 항상 쫓길 이유도 없고 먹을 것을 쉽게 구할 수 있고 편히 살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단지 그 뿐이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지마는, 개들은 원래 자연에서 무리를 이루고 사냥을 하던 동물이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자연의 동물은 자연으로. DMZ는 저들의 이상향이다. 사람에게 이 구절을 대입한다더라도, 그곳의 의미는 역시 자신이 하고픈 바로 조금 바뀔 뿐 큰 의미 변화가 없다. 한편, 생략된 서술어는 역시 '가다'의 청유형인 '가자'일 터이다.)
- 가파른 언덕을 지나?(이상향에 닿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하나를 상징적으로 보인다.)
- 하늘을 날아 숨이 차올라?(하늘을 난다는 구절을, 초소 지붕 위에서 도움닫기를 하여 날아올랐던 뭉치와 수류탄이 터져 뭉치가 날아올랐을 때와 연관지어 생각해 보자. 뭉치는 그 순간에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말로 표현 못할, 짜릿한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만끽한다. 하늘을 난다는 구절은 이상향에 닿기 위한 끊임없는 도전을 의미한다. 한편, 숨이 차오른단 말은 제아무리 위버멘슈(극복인)라도 느낄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의미한다. 위버멘슈라도 불알을 맞는다면 존나게 아플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위버멘슈가 아니라 슈퍼맨이겠지.)
- 주저앉고 싶을 때?(앞서 느낀 한계에 좌절하고 굴복하고 현실에 순응하고 싶고 자신이 하는 행동에 회의가 들 때를 말한다. 가끔은 돈키호테가 부럽지 않은가? 괜한 풍차에 돌격했다가 크게 다쳤으면서도 계속 극복하고 돌진하는 그 모습이?)
- 내 손을 잡고 다시 일어나?(앞서 여러 번 반복한, 서로 의지할 만한 대상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서로 의지할 만한 대상은, 서로를 격려하고 북돋우면서 함께 성장해 나아가게 할 수 있다.)
- 절대 놓지 않을 거야?(나와 내가 의지하는 대상 사이의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응원과 격려와 의지를 담은 구절이다.)
- 어두운 숲속을 헤매여도?(어두운 숲속은 끝없는 밤과 마찬가지로 수없이 헤쳐 나아가야만 했던 고난과 역경을 상징하며, 거기서 헤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목적과 자신 그 자체와 삶의 의미에 관한 상실과 탐구와 고민으로 볼 수 있다.)
- 달빛 따라 길을 찾을 거야?(한밤 중에 가장 밝게 빛나는 천체가 달이므로, 달은 어둠 속에서 헤매는 이에게 힌트나 도움을 주는 존재를 상징한다. 그리고 길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의 방향을 가리킨다.)
- 느닷없이 내린 소나기가?(소나기는 예기치 못한 역경의 습격을 의미한다.)
- 너와 내 앞을 막아서도?(너와 내 사이를 가로막는다는 의미와, 같이 걸어가던 우리 앞을 막는다는 의미,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나'는 '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도 극복해 나아갈 것이라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이전에 반복적으로 나온, 서로를 믿고 의지하면 그 어떤 역경이라도 저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 끝없는 밤을 지나서
- 새벽을 건너 아침이 와도
- 그날을 기억할게
- 행복을 찾아 함께 달려가
- 꿈꾸는 그곳으로
- 가파른 언덕을 지나
- 하늘을 날아 숨이 차올라
- 주저앉고 싶을 때
- 내 손을 잡고 다시 일어나
- 절대 놓지 않을 거야
- 두렵지 않아?(시적 화자는 공포, 트라우마, 악몽, 수동적 허무주의, 좌절, 역경, 운명 순응 등을 모두 극복하였다.)
- 그곳으로?(그곳은 이전에도 말했듯이 이상향을 뜻한다. 시적 화자에게는 더이상의 장애물이 없으니 쭉쭉 밀고 나아가자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 부분이 노래의 하이라이트로 음악과 함께 들으면 소름이 쫙 끼친다.)
-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
- 눈앞에 비친 낯설은 세상
- 어제와는 다른 오늘?('어제'는 과거의 대유법으로, 비참하였던 과거를 극복하여 마침내 이상향에 닿은 시적 화자가 처음 맞이하는,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말로 표현 못할 하루와 무수한 감정들을 함축하고 있다.)
- 꿈꾸는 그곳으로
- 음
오류 고찰과 트리비아 및 팩트체크[편집 | 원본 편집]
- 사이비 종교 단체인 '칭하이 무상사'에서 관심을 가져 준다?
- 실제론 비무장지대보다 민통선 안의 자연이 더 울창하다고 한다. 비무장지대에서는 봄가을로 나무를 베걸랑. 스무 살 먹은 나무가 2할도 안 된다는 게 믿기는가? 그런고로, DMZ는 영화 속보다 다소 황량한 편이다.
- 중국에서 사드 배치로 인한 한한령 여파로 인해 일방적으로 투자 철회를 해서, 이 영화는 도경수의 한국, 일본 팬들의 후원과 크라우드펀딩으로 겨우겨우 개봉됐다. 그래서 엔딩 크레딧 끝에 팬덤 이름과 크라우드펀딩 참여자들 이름이 등장한다.
- 2018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의 개막작이자, 역대 BIFAN에서 최단시간(9초)으로 매진된 영화다.
- 뭉치가 철책을 넘는데 쓰인 수류탄은 폭발할 때에 금속 파편이 퍼져서 '살상 범위를 확대하는' 세열수류탄이므로, 실제로 저렇게 넘는다면 다진 고기가 될 것이다.
- 영화 속에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을 피아노로 연주한 이는 언더독의 OST를 작곡한 '이지수'로, 영화 《올드보이》의 일부 OST와 《마당을 나온 암탉》의 OST(대표곡: '바람의 멜로디')를 작곡한 걸로도 유명하다.
- OST 가운데 《개들의 여정 II》에는 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의 첫번째 OST 트랙인 《양계장 풍경》의 도입부 멜로디가 쓰였다. 왜냐고? 같은 작곡가니까.
- 개들이 자유로를 건널 때에 찍힌 사진을 사냥꾼이 보고 있을 때, 모니터에 뜨는 사진들이 영화의 장면을 재활용하고 있다.
- 사냥꾼이 목에 달고 있는 흰색 피리는 개피리로, 주로 사람은 잘 듣지 못하되 개들은 들을 수 있는 주파수의 소리를 낸다.
- 디시위키에서는 내용 요약이라며 포켓몬스터 꼬북이 짤만 올렸다. 뭔 뜻이냐고?
꼬우면
북한에
이민가― 그래서 했잖아
도보시오[편집 | 원본 편집]
- 넘겨주기 틀:Existentialism
- 괄티에로 야코페티 ― 몬도가네
- 인류의 반지성주의, 반윤리적 행위 비판
- 괄티에로 야코페티 ― 속 몬도가네
- 인류의 반지성주의, 반윤리적 행위 비판
- 최인훈 ― 광장
- 풍문에 안주하지 않고 찾아 나서는 삶, 광장과 밀실을 위한 투쟁
- 스튜디오 지브리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 자연과 인간의 조화 주장
- 스튜디오 지브리 ― 모노노케 히메
- 자연과 인간의 조화 주장
- 무키무키만만수 ― 투쟁과 다이어트
- '그냥 잘, 편히 잘, 있는 그대로' 살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것을 위한 고통스러운 투쟁을 절실한 비명으로 표출한 곡
- 노브레인 ― 나는 재수가 좋아
"쉬운 일 하나 없는 세상 워어"
"시작은 힘들어도 결국 승리하지""넓은 하늘을 나는 기분이야"
"세상 모두 다 가진 기분이야"
- 조세희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연작 소설
- 현대 사회의 모순 비판
- 하근찬 ― 수난이대
- 역경을 헤쳐 나아가기 위한 초당적 협력의 필요성
- 피터 싱어 ― 동물 해방
- 피터 싱어와 인터뷰 중에 피터 싱어가 언급함. 개체론적 환경윤리에 따른 평가로 인용.
- 크리스토퍼 버드, 피터 톰킨스 ― 식물의 신비생활
- 피터 싱어의 의견을 부분 반박하기 위해 인용
- 박광현, 장진 ― 웰컴 투 동막골
- 탈이데올로기와 평화주의, 화해와 협력
- 이육사 ― 절정
- 극단에 내몰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 케빈 러드 전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 '빼앗긴 세대'에 대한 사과문 (유튜브 영상)
-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영유아의 강제 납치 및 백인 가정 분양과 개 공장의 유사성
- 이대희 ― 파닥파닥
-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자유와 삶을 향한 갈망과 끊임없는 도전
- 장용학 ― 요한 시집
- 누에같은 존재, 노예같은 처지의 한 인간이 모든 구속을 떨치려는 극단적 시도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
- 최인훈 ― 구운몽
- 5.16 쿠데타로 좌절되고 빼앗긴, 4.19 혁명이 우리에게 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그리움, 5.16 쿠데타가 우리에게 대신 쥐어준 소시민적 성격과, 모순과 압제에 대한 저항과 실패
- 이기영 ― 고향
- KAPF 문학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 시대와 혁명의 구체적이면서도 사회주의의 관점에서의 리얼리즘(사회주의 리얼리즘)적인 묘사, 에로스?(성적인 사랑)를 초월하는 필리아?(동지애, 우정).
- 최서해 ― 탈출기
- 피지배자로서의 비참함과 작가 개인 경험?(최서해는 정말로 가랑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래서 소설 속 주인공처럼 간도로 넘어가 두부를 만들어 팔면서 살아왔다.)에 대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 이에서 탈출하기 위해 행동하기 시작하는 주인공.
- 국립국어원 ― 표준국어대사전
- 인물 및 학파, 사상, 용어 해설 참고용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자칭, 인류에게의 가장 큰 선물. 니체 철학의 집약.
- 거북이 ― 빙고
- 가사에서 니체의 철학을 굉장히 많이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