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사감과 러브레터
우리 누나가 고2일 적의 일이다.
그러니까, 삐삐를 쓰고 있을 적 말이다.
그때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고 한참이라, 양성평등도 한창 이슈였다. (그리고 호주제 폐지의 목소리가 한참 컸던 때다. 폐지가 되려면 참여정부 때까지 가야 하니.)
그때 우리 누나는 개신교 계열 기숙 사립 여고를 다녔다.
그리고 그 여고 교사(누나의 담탱이였다.) 겸 사감쌤이었던 B사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누나가 나한테만 ― 과연 그럴지는 몰라도 ― 해준, B사감 썰이 있다.
B사감은 그 여고 뿐만이 아니라 주변 다른 고등학교에도, 심지어 남고에까지도,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B사감은 독신주의자에, 찰진 욕을 구사하는 욕쟁이자, 개독이며, 남성혐오로 ― 지금이랑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 유명했다.
또한 B사감은 사십에 가까운 노처녀에, 주근깨투성이며, 처녀다운 면은 없고, 시들고, 거칠며, 마르고 누레 뜬 게 마치 곰팡이 슨 굴비 같았다.
여러 겹 주름이 잡힌 훨렁 벗겨진 이마, 숱이 적어서 차마 틀어올리질 못하고 엉성하게 그냥 빗어넘긴 머리꼬리가 뒤통수에 염소똥처럼 붙은 것이라든지, 벌써 늙어가는 자취를 감출 길이 없었다.
뾰족한 입을 다물고 돋보기 너머 근시안으로 노릴 때엔 기숙생들이 오싹하고 몸서리를 칠 만큼 B사감은 엄격하고 매서웠다.
그 시절에 삐삐가 있었대도 공중전화가 있어야 내용을 들을 수 있었고, 여러모로 딱딱한 개신교 계열 사립학교는 콜렉트콜마저도 (082-17나 1541, 1655 말이다.) 허용하지 않았다. ('설치하지 않았다'가 좀 더 정확하지만.)
그래서 외부에서 학생과 소통하고자 한다면 일요일에 학생이 귀가하거나, 안으로 편지를 넣어야 했다.
그러나 여고 안에는 으레 러브레터가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B사감은 러브레터를 싫어했다.
그래서 B사감은 교내로 들어오는 편지를 모두 검열했다.
그러다가 러브레터를 받은 학생은 그날 사감쌤에게 '좆된 것이었다.' (누나가 진짜 이렇게 말했다.)
예컨대, 우리 누나의 예를 들자면, (나는 아직도 누나가 왜 러브레터를 받았는지 이해 못한다.)
"부르셨어요?"
"그래 불렀다! 왜!"
하고 사감쌤이 팍 무는 듯이 한 마디 하고 나서, 매우 못마땅한 듯이 의자를 우당퉁탕 당겨서 팍 앉았다가 그저 서 있는 것을 보면은 또,
"앉어! 장승이냐?! 왜 앉질 못해!"
하고 또 소리를 빼애액 질렀다.
"니 죄를 니가 알렷다!" (이건 누나의 상상이다.)
"이거, 누구한테 온 거냐?"
하고 사감쌤이 물으면, 누나는 겉봉투에 써진 제 이름을 보고 당돌하게
"저요."
하고 말한다. 당연한 사실이잖나? 그러면,
"이거, 누구한테서 온 거냐?"
하면 누나는 모른다고밖에 말을 못한다.
"니한테 온 걸 니가 모른다고?!"
하고 '사자후를 내뿜는다.' (라고 누나가 진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읽어!"
그러면 누나는 눈으로 묵독하기 시작한다.
"소리내서 읽어!"
하면 누나는 성경을 읽듯이 또박또박 큰 소리로 읽는다.
B사감은, 꿀처럼 달콤한 말이 뚝뚝 떨어지고 깨소금같이 고소하고도 크림소스 파스타 같은 느끼함이 느껴지는 시적인 문장이 나올 때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다.
그래서, 누나가 편지를 다 읽고 나면 B사감은 일장 연설을 한다.
그 연설을 요약해서 요즘 말로 고치면 이렇게 된다.
"'한남충'은 그 '소추' 크기만큼보다도 신뢰할 수 없는 것, 우리 여성을더러 '짬처리'시키려는 마귀인 것, 자유 연애도 사탄이 인간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지어낸 소리인 것."
그리고 '탈코르셋'을 하고 래디컬 페미니즘에 동참할 것을 종용하며 이렇게 기도한다.
하늘에 계신 성모 마리아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성모님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가톨릭에서도 성모 마리아는 단지 성인 가운데서도 예수에게 기도를 전해주는 한 명일 뿐인데, B사감은 거의 이단 수준이었다.
또한 탈구조주의의 매력에 빠진 나로써도, 여성성을 결핍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남성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다원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에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거기에다가 개독이라니, 니체처럼 딱 한 마디 외치고 싶었다.
"신은 죽었다!"
B사감은 또한 학교에 남자가 면회오는 걸 싫어했다.
심지어는 학생의 아버지가 와도 수업 중이니, 방과 후 수업이니, 야간자율학습 등 갖은 핑계를 대어 쫓아내었다.
학생이고 학부모고 불만이 쌓이다가 결국 터지고 말았다.
B사감은 교장과 교감, 심지어는 이사장에게도 수차례 경고를 받았으나 여전히 제 사상을 고집했다.
언제부턴가 학교엔 밤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누나가 기숙사에서 자정을 넘겨 중간고사 준비를 하던 때였다.
기숙사는 2인1실이었고, 누나는 《수학I》을, 누나 친구는 시험에 나올 《영어I》 지문을 암송하고 있었다.
그때 웬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둘이 낸 소리가 아니고, 다른 방에서 새어나온 소리였다.
거의 매일 밤마다 계속되는 일에 누나는 결국 샤프를 팽개치며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어떤 년이야, 씨발."
"그러게 말야. 설마 전과목 올수 나오는 김신비 걔가 화냥질 하는 거 아냐? 목소리 닮았는데?"
"직접 가보자."
"그래서 뭐 하게?"
"담탱이한테 꼰지르게."
"이야, 사감년이 이런 좋은 기능도 있네."
둘은 종종걸음으로 신비의 방으로 갔다.
그러나 신비는 자고 있었다.
잠꼬대도 아녔다.
둘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신비가 아녔다는 것보다도, 올수 나오는 애가 벌써 자고 있다는 것에 더 놀랐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둘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기로 했다.
그때,
"오! 윤호 씨, 어떡해요!"
간드러진 여자 목소리다.
"리나 씨가 좋으시다면 저야 얼마나 좋겠어요. 아아! 리나 씨께 바치는 제 타는 듯한 가슴을 이제 아셨어요?!"
정열에 찬 남자 목소리가 분명했다. 한동안 침묵....
그러다가 누나가 물었다.
"리나가 어떤 년이냐...?"
"몰라. 웬 화냥년이 이 시간되게 이 지랄이래...."
제 방으로 돌아오는 길, 둘은 한 방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걸 보았다.
그리고,
"인제 그만 놔요. 키스가 넘 길어요. 대신 하나 약속해요. 오늘 이 밤, 절 지켜주겠다구요."
애교 가득한 여자 말투.
둘은 소름이 돋았다.
"다다익선. 길수록 더 좋잖아요? 짧아서 아쉬운 걸요. 리나 씨야말로, 원하신다면 언젠가 이 세상의 모든 아침을 저와 함께 해 주시지요."
남자의 말에 둘은 소리만 안 질렀지, 엄청 호들갑을 떨었을 게다. (누나가 이 얘기는 안 했지만 분명 그랬을 거다. 누나 성격은 내가 제일 잘 안다.)
"진짜 화냥질한다!"
그리고 둘은 이상야릇한 상상을 했는지도 모른다.
계속,
"난 싫어요! 아무리 그래도 당신 같은 남잔 싫어요!"
"내 천사, 내 하늘, 내 공주님, 내 목숨, 내 사랑! 오! 나의 예쁜 리나 씨! 절 살려줘요! 절 구해줘요!"
남자도 엄청난 구애를 한다.
둘은 빛이 새어나오는 문틈 사이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헉!"
둘은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게 두손으로 입을 확 틀어막았다.
그 방은 다름아닌 사감실이었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둘 다 B사감이었다.
"야! 야! 씨발, 담탱 이름도 리나였잖아!"
B사감은 러브레터를 너저분하게 흐트러뜨리고, 하나씩 골라 잡아가면서 거기에 얼굴을 비비면서,
"제가 그렇게 좋아요? 정말요? 진심이죠?"
하고 젊은 여자 목소리를 내더니, 목소리를 바꾸어
"리나 씨! 아직도 제 맘을 모르시나요? 어떻게 해야 절 믿겠어요? 전 리나 씨를 위해 뭐든 하겠습니다!"
하고 원맨 쇼를 한다.
둘은 저들끼리 호들갑을 떨며 방으로 뛰어 돌아가되, 발소리가 나지 않게 까치발로 뛰어갔을 것이다.
"미쳤어! 미쳤어!"
하고 방 안으로 돌아와 다시 책상 앞에 마주 앉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
"존나... 존나 불쌍해!"
도보시오[편집]
Written by an Existentialis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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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차이나 게이트, 공화국의 소리, B사감과 러브레터,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
비평문 | 발토 3부작(1 · 2 · 3), 언더독, Elokuvateatterinmuistikirja |
삼류 만화 | 개의 세상, 리버티문고, A Snake on a Train, 성저십리 사람들, 프티부르주아지의 은밀한 매력, 보스니아 순례기, 과수원일기, 군대 가기 전에 늘어놓는 군말들 |
초딩소설 | 사량손냄과 언먀 |
사전 | 일베용어사전, 조선말대사전으로 바라보는 북한 |
기타 | Vietato Fumare, Gay Science for High-School Students |
- 현진건 ― B사감과 러브레터 (원작)
- 이름은 롑흔리나의 초딩소설, 사량땨의 안 헬꺼야의 등장인물 이름(긤 싱븨, 긤 릐나, 졍 윤호)에서 유래되었다.
- 마지막 대사는 따리린의 초딩소설, 존나사랑해의 중간에서 나오는 대사(존나... 사랑해-만수-)에서 유래되었다.
- 리나와 '윤호'의 대화 중 일부는 코나의 노래, 《우리의 밤은 당신들의 낮보다 아름답다》에서 유래되었다.